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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윤택 로컬프로젝트 “졸고 있는 소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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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된 운동의 근거 찾기와 공간의 소멸

- 청주 시립미술과 로컬 프로젝트 사윤택 “졸고 있는 소년”에서 -




김기현 미술칼럼니스트, 충북미학연구소 소장

들레즈는 『천개의 고원』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공저
‘얼굴성’에서 카프카의 단편소설집 『어느 개의 연구』에 들어 있는 『나이든 독신주의자 블룸펠트』 카프카의 단편 소설
의 예를 들어 ‘추상의 기계’를 설명하였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독신의 남자가 두 개의 작은 탁구공이 스스로 마룻바닥에서 벽 위로 튀어 올라 여기저기 다시 튀고, 심지어 얼굴까지 튀어 오르려고 하고, 그 안에 좀 더 작은 전구들을 담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블룸펠트는 마침내 그것들을 한 작은 방의 검은 구멍 안에 거두는데 성공을 한다.”, “블룸벨트가 공들을 어느 허약한 청년과 얼굴을 찡그린 두 소녀에게 주려고 하고, 이어서 그가 사무실에서 얼굴을 찡그린 허약한 두 명의 견습 사원들이 서로 빗자루 하나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드뷔시와 니진스키의 멋진 발레에서도 작은 테니스공 하나가 황혼녘의 장면에서 튀어 오른다. 여기서 추상적 기계는 잠과 황혼녘과 환각과 즐거운 육체적 경험 등의 우회로를 통해 우리가 기다리지 않을 때 출몰한다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이렇게 스스로는 유희하면서 어떤 의도도 갖지 않지만 누군가를 끊임없이 신경 쓰이게 하는 의문스러운 공들의 존재를 없는 공간에서 찾는다. 사윤택의 작품 속에서 이야기하는 자와 이야기 하려는 자는 동일한 존재로 타자가 만들어낸 회화의 자아이다. 작품 안에서 공동의 시공을 공유하는 유희를 보여주면서 유희하지 못하게 하고 경직된 관념 속으로 끌어들인 존재는 결국 관객이 아닌가 한다.

10여 년 전 화가들의 작업실을 소개하는 지역의 일간지 기자가 사윤택 화가를 찾아 쓴 인터뷰 기사는 사윤택 그림의 운동과 정지에 대한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다. 오래 전 기억이라 다시 기사를 찾아 당시의 사윤택의 창작 생각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때도 어려웠지만 지금도 역시 쉽지는 않았다. 기사의 시작부터 의미심장하다. “정지된 그림 속에서 표현의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화면에는 느닷없이 공이 날아오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화면에는 역사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아이러니를 남기기도 한다.”, “그가 시공간을 초월한 이종교배에 의한 그림을 완성해 가는 단계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작품 전반에 흐르는 흥겨운 무엇인가가 보는 이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 속에서 벌어지는 삶의 허점은 재치 있는 웃음을 자아낸다.” 인터뷰의 내용에 대한 기자의 솔직한 심경을 이런 말들로 기사화 하였다. 기사들을 분석해보면 몇 가지로 나열해 볼 수 있다. 정지된 것과 움직이는 것, 시간과 공간의 의미, 과거가 공존하는 현재성, 희화한 회화의 재치 등과 같은 것들이다. 기사들은 의문투성이이고 의문에 의문을 더하였다. 의문이 꼬리를 무는 것은 오히려 사윤택 작가에게 어울리는 형상 추상의 전개적 표현이다. 그와 대화를 하거나 인터뷰를 하여도 전혀 정돈된 추상의 철학이 아닌 개인 세계관의 관념과 개념의 충돌이다. 나이든 독신주의자보다 어렵다.

이후 2023년 사윤택 화가가 최근의 작품을 들고 청주시립미술관으로 왔다. 전시장은 전국의 레지던시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작업들이 서로 엉기고 뒤 섞여 자칫 혼란스런 공간 연출로 보였다. 벽면을 거부한 그림들은 제각각의 위치에서 관객에게 무작위 도열을 하고 있다. 그림들을 공간에 강제 배열을 한 전시로 보여 불편하지만 기획의 의도적 시각화로 이해를 해야 했다. 필자가 보기에도 그간의 시립미술관이 기획한 로컬 프로젝트에서 보여준 전시의 방식과는 다소 달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거대한 작품이 관객을 압도 하는가 하면, 아주 작은 그림들에서는 작품 자신들의 주절거림을 들어야만 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관객은 미술관으로 들어오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선험적 경험의 부재나 전시 정보의 부족 등으로 현대미술을 이해하려는 관객에게는 적지 않은 과제이다. 미술관 공간에서 개인적으로 미적 감성을 끌어내려는 노력의 부담이 되기도 한다. 아비가일 하우센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은 미술을 인지하는 특성을 연구하여 발표 하였다. 인지 발달이론을 미적 발달 단계에 적용하여 미술작품을 볼 때 사고하는 과정을 단계로 나타내었다. 큰 결론은 미술 감상의 능력과 미적능력은 결코 자연 발생적이 아니라 미술에 대한 경험과 스스로 터득한 지식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연구 결과라 보이지만 그들이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은 차이가 있다. 두 연구에서 관객 스스로 설명을 하거나 개인적 선호가 초기에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는 그림을 가까이 대하는 첫 번째 단계라고 한다. 이후에는 미의 사실이나 구성을 해석하게 되고 양식이나 형태에서 자율성을 갖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단계들은 시각적 사고의 전략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론으로 보이지만 시각적 이미지를 간정으로 해석하면 차이가 보인다. 문해(文解)에서 도해(圖解)로 넘어가는 과정의 능력 향상이 다분히 비판적 시각에서만 나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사윤택 작가의 “졸고 있는 소년” 전시장에서 관객이 잠시 머무는 작품이 있다. 바다의 잔잔한 파도 같기도 하고 유영하는 어떠한 물체의 연속성으로 보여 지기도 한다. 관람자에 따라 수련을 떠올리는 이도 있다. “순간의 기억(2023년 작)”이다. 수면위에 그림을 그린 것 같은 회화의 확장이다. 이 작품에서 두 작가를 떠올리게 된다. 우연성의 추상주의 화가 잭슨폴록 화가. 미국태생.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인 화가
과 회화의 확장 카타리나 그로세 화가. 독일생. 베를린 거주. Public commission 작업으로 활동.
이다. 사윤택 작가는 여수에서의 레지던시 시절의 바다를 그린 것이라 한다. 아침과 점심, 그리고 저녁에 달라지는 바다는 자신의 심성으로 해석이 불가능하여 우연을 차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폴록의 작업처럼 바닥이 아닌 중력의 흐름을 이용한 것으로 적당한 힘의 균형과 긴장으로 보인다. 물(物), 여기서는 재료로 그 속성을 파악하여 적당한 점질과 색의 유도를 인위적 힘과 대항을 하는 긴장성이다. 아무튼 이렇게 그려진 그림을 벽을 외면하고 부유하는 듯 두 개의 작품을 둔각으로 배치하여 그림을 대하는 관객의 지위에서 부담스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미지는 있지만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 그림에서 미적인지로 현대성을 발견하기에는 벅차 보이기도 했다. 감상자는 다양한 층위가 있다. 이들을 위한 미술관의 선택은 보편적 층위에 대한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 물론 스스로 발견하고 느끼게 하는 것은 기본적 환경이다. 하지만 전시를 기획한 미술관이 작가의 미학이 시각적으로 전달이 되도록 제공되는 소통의 과정은 필요하다. 현대 미술은 난해하니 난해한대로 감상을 하라는 방치나 명령 같은 것으로 일관되어서는 무책임한 것일 수도 있다. 관객은 동일한 기준에서 작품의 가치를 사회적 인습에 준하여 판단하는 동시에 주관적인 감상 형태를 보인다. 학습이 주는 경험재이다. 우리가 경험한 것들의 익숙함을 지식화 하기 위하여 스스로 선택하여 새로운 주변 환경을 경험하려는 것은 미적발전의 과정이다. 이는 개인의 가치가 사회의 가치로 확장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객은 보편적인 가치관과 연계할 수 있는 지점을 제시하는 것도 관람자가 전시 작품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요소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다시 이야기하면 미술관의 주체적 환경에서 제공이 되어 주어야 맞는다. 작가 인터뷰 영상이나 전시장 입구의 텍스트를 제공했다는 것보다는 일반 성인 관람자를 위해서 미술관의 서비스 이전도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전시의 필요성과 선택, 중요성과 작가의 인지 등 관객입장의 대중적인 사회상과 관계하여 그들 관객이 생각 할 지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전시된 그림에서 작가는 이미 없다고 한다. 그러나 치밀하게 작가는 존재한다. 미술은 없다 미술가만 있을 뿐이라는 곰브리지의 말대로 작가는 자신을 이야기 할 필요가 있다. 관람자가 특히 난해한 현대미술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질문과 부정적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지역 미술관의 진화과정이다. 이는 미술관뿐 아니라 미술계의 해석과 지식을 제공하여주는 것도 미적 효과다. 작가의 작업 의도나 혹은 전시기획 의도를 제시하여, 주관과 객관을 이해로 유도하는 것은 효과적인 전시를 위한 작위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사윤택의 작품에서는 과학적 미학으로 읽어 내어야 수용이 가능한 작품들이 수없이 많다. 그것은 그가 공간을 지배하면서 시간을 정지시키고자 하는 작업으로 순간의 이미지이다. 순간은 시간이고 이미지는 공간이다. 이 시공은 인간이 내부와 외부를 장악하는 힘으로 작용을 하여 일부 조건으로 제한되기도 한다. 작가의 존재 속에 시공이 있다고 본다면 내부(자아)에 대한 사고의 존재이며 외부(타자)의 인식으로 사고하고 투영하는 존재가 작가이다. 시공, 즉 시간과 공간은 분명한 경계로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경계에서 생산되는 일체화는 분리되지 않은 혼종의 물리적 구성이다. 시간과 공간은 유기적 관계로 닮음과 다름의 특징으로 사유적 질서를 유지하며 대칭성의 우주적 존재의 문제를 개념화시키고 회화로 인식하게 한다. ‘기억되는 순간들, 순간’의 기억 시리즈와 공간을 이탈하는 언어적 ‘쉭~’, ‘슉 장풍’들은 물질이 이동하면서 내는 기호로 보여 진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이지만 물질의 소리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운동의 탐색이자 정보 전달의 텍스트이다. 작가가 시간성을 공간에 나타내기 위한 형상을 이동 될 공간 영역에 확장하여 주관적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은 현대 미술에서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 역시 소재의 영역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간혹 관람자로보터 무시되는 원근 사용이나 의도적 합리성으로 구성된 합리화는 무한의 공간이 아닌 작위 된 내적(자아)공간으로 해석된다. 공간 안에 시간을 배열하여 시작과 끝을 연결 지으려는 시도는 힘이 가해진 에너지의 이동으로 중첩되어진 이미지가 시간의 과정을 상징화하여 표현되어 진다. 이는 결과적으로 시간의 문제로 문제를 파생 시키게 된다. 시간의 의문은 철학의 의문이다. 미술은 회화적으로 공간과 시간의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 미술에서 회화는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제공된 물리적 시간이라 할지라도 소요되는 사용자에 따라 시간의 흐름과 경계는 달라진다. 회화는 이러한 허구의 현실적 시공을 내면적 경험 재를 바탕으로 창작하게 된다.

청주시립미술관 로컬프로젝트 사윤택의 작업은 회화 안에서의 시간을 정지시키려는 의도적 도구를 견인하기도 한다. 앞에서 화가를 예를 들었다. 회화의 확장을 화면을 이탈하는 행위로 작업한 그로세이다. 자연과 인공의 가설을 회화가 긋고 지나가는 것을 확장으로 해석하였다. 화면을 벗어난 것이다. 사윤택의 작업에서 화면의 이탈은 시간의 이탈이다. 화면의 이탈은 시간의 정지를 위해 원시의 구도를 가져다 활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전시장 주변의 그림에서 화면을 이탈하는 여러 기구나 도구들을 기의화 하려는 의도는 이미 이름 지어진 물체의 새로운 이미지화의 노력들이다. 기의는 기표와 함께 기호의 한 구성 부류로 법칙이나 물의 관계를 이야기 한다. 회화는 시각 언어의 생산으로 볼 때 사윤택 작가가 생산한 이미지의 공유는 다분히 사실을 바탕으로 한 실증된 논리 논리실증주의, 1920년대~1950년대 유럽과 미국의 철학 사조. 감각 바탕의 관찰 주의 명제 철학.
로 보여 진다. 학습된 경험은 선험자의 경험을 토대가 되어 시대에 전이 되고 진화를 한다. 작가의 작업이 스스로 진화된 것 이라기보다는 경험재의 충돌과 반복된 지층에 의해 밈이 된 것이다. 기존에 존재하였던 학습된 기억의 암각화를 바탕에 두고 그려진 페인팅은 화면에서 튀어나온 인간의 허상과 사물들의 부 조합에서 추상성은 강해진다. 사윤택 작, 「슉과 장풍」, 2021-2023
필자는 여기에서 추상을 이미지가 없는 이미지가 아닌 가설의 이미지로 관객이 인지하지 못하게 표현된 추상으로 본다. 그것이 그의 회화에서 발견되어지는 것들 중에서 지금이라는 순간의 반응이 그림 안에서 머물지 않고 확장이 된다로 해석되어 진다고 재해석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가는 시간의 의식 행위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과정화하고 이를 물리적인 작가 정신으로 개념화된 이미지이다. 여기서 개념은 그가 사용한 도구에서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미지의 이미지화로 추상화 한 것이 사윤택의 그림이라고 했다. 서두에서 들레즈를 예로 들며 카프카의 단편소설집 ‘어느 개의 연구’에 들어 있는 ‘나이든 독신주의자 블룸펠트’이야기를 하였다. 사윤택 작가 작업에서 운동은 언어를 기표하는 얼굴성(의미를 나타내는 형식 형상)의 자동기술법을 유추한다. “독신자로 사는 한 남자의 이야기. 어느 날, 반려견을 키운다면 어떨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전혀 키울 수 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순간 눈 앞에 바닥을 통통 뛰어오르는 공들이 보이고 독신자의 주위를 맴돈다. 오히려 이 공들이 반려동물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프란츠 카프카 “어느 개의 연구”, “나이 든 독신주의자, 블룸펠트” 중에서
운동-이미지에서 얼굴성의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이 진정한 보편성을 담보한 개념이라면, 그것이 현실 속에 적용될 때 타자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서 무한한 변화와 변이의 성분이 되어야 한다. 들뢰즈와 기타리의 ‘기계’와 ‘추상기계’ 들뢰즈, 가타리의 개념어. 푸코의 권력 작동 방식지배를 다이어그램 화 한 것을 인용.
도 개념의 도구들이다. 개념은 작가의 정신에서 세상을 보는 심리이다. 심리는 창을 통해 마음을 드러낸다. 인간의 구성 단계인 세상이라는 조직은 스스로 허망한 경험을 통해 질서를 만든다. 보편성을 담보하지 못한 개념들에 의한 질서화는 중심과 주변을 만들고 타자를 만드는 것을 함축한다. 경험이 아닌 학습으로 체득된 시대를 작품으로 들이는 도구화는 타자를 자아의 경계에 두어 타자를 억압하는 추상으로 재현되었다. 확장을 위한 회화의 본질적 해석이 내부를 이탈한 것이다.

사윤택 작가의 그림은 일상의 놀이가 주된 주제이지만 놀이가 아닌 표정의 동작이다. 그의 작업에서 비 정형 도식의 놀이 회화는 회화놀이로 희화화 될 수 있는 경계에서 위험스럽게 서있다. 하지만 위험스런 경계의 회화에 그 만의 수식이 있다. 수식으로 계량화 하여 어디(공간)에서가 자유로움(시간)의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결국 작가는 수식으로 해석되는 자연과학을 개념을 동원하여 인문학으로 인식하게 하는 추상성의 회화인 것이다. 작품의 감상이 관객의 책임이라고 하기에는 대상(회화)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도구로서의 개념을 존중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의 개념은 시간을 상대적으로 해석하여 일반화 되지 않은 논리를 논리의 경계로 무의식화 한 작업으로 보인다. 개념은 도구라 했다. 그가 도입한 보이는 것을, 보이도록그림으로 표현하여 관객에게 보여 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도구인 개념으로 화면에 나타나지 않은 대상을 보이도록 작위 한 작업이다. 회화에서 이미지는 화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화가의 창조성에 주관한다. 비 가시의 가시를 위한 행위는 예술가에게 지위로 나타난다. 회화적 권력이 화면에 작동하게 되고 회화 언어로 소통된 이미지는 실제가 될 때 지위를 얻게 된다고 한다. 가상이 실제를 지배하는 시대의 추상은 형상이 존재하는 가시적 추상이다. 희화된 이미지 연출로 해석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술의 작품은 낯설게 하기의 과정이다. 닮아 있지 않은 회화에서의 이미지 창출이 질료 사물의 생성은 사물을 형성하는 요소와 한정을 받아들이는 요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용어.
에 의해 사건이 되기도 한다. 작가의 고민이 충분히 수렴된 과정에서의 회화작업이다. 그는 그동안 끝없이 탐구하고 있던 방법론 사회학적 근거. 자료의 조작과 지식의 습득을 위해 사용되는 기법. 예술과 같은 분야에서의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연구 시 사용.
은 이제 오히려 작가 자신을 괴롭히는 논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예술가들, 특히 미술가에게 창작의 권태는 회전목마처럼 되돌아올 때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낸다. 사윤택 작가가 방법론이 자기 스스로를 죄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이라 생각 된다. 추상성의 작가 머릿속을 비우고 그가 접하고 있는 주변 환경에서 내면(자아)을 찾는 일이 오히려 새로운 경험재로 돌아 온 것이라 했다. 그는 스튜디오가 주는 억눌림의 무게가 갇힌 자유로움이라는 아이러니로 표현을 하고 있지만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시간의 움직임에 의한 작품이 희화한다는 것은 시간을 유희와는 다른 표현 방식이다. 주변에서 보여 지거나 행해지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시각으로 시간을 표현해야 한다는 책임감 보다는 함께 있다는 즐거움으로 작품에 시간을 희화시키기도 했다. 사윤택 작가의 작업에서 캡처(이미지 포획)된 이미지는 왜곡된 형상으로 변형되거나 물질적이지 않은 형상으로 재현하는 유머 감각의 발생이다. 이러한 작업은 시공에서 순간 보여진 시간을 공간화하여 작업하기 적합한 것이 아주 작은 그림이나 드로잉과 같은 것들 이었다고 작가는 이야기 한다. 순간의 기억이 사라지기전 남아 있는 잔존이 회화로 전이 되는 순간의 전율은 시각의 뒤틀림 사윤택 박사논문 『이미지 현상과 사건을 반영하는 현대회화에서의 시간성에 대한 연구』, p.87
에 있다고도 했다. 인체와 공간의 뒤틀림은 이동하던 시간의 정지가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으로 시각이 따라 잡을 수 없는 물리적 환경이다. 사윤택 작가의 희화된 회화의 이미지 확장은 이미지의 채집하는 과정으로 본다면 발터 벤야민의 ‘상징의 해체’로 접근해야 했다. 기록된 도시와 물상, 인물의 이미지는 경험재로 인지하고 해석을 하지만 회화적 접근의 방식은 작가가 찾은 고정된 이미지를 재해석하여 상징화 하여 해체한 것이다. ‘순간의 기억’ 시리이즈 작품들의 사건 재해석이나 작품 ‘진술’에서의 보안카메라 캡처 역시 상황의 재 연출에 의한 작가해석이 해체이다. 여기에서 작가가 차용한 카메라 캡처에서 해체에 대한 문제를 만들어 본다면 사진의 기술이 회화로 이동을 한다고 보아도 아우라 발터 벤야민의 예술이론, 예술작품에서의 분위기
는 해체되지 않는다. 베르그송은 “시간을 다루는 것은 과학적 사고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했다. 그 이유를 과학적 사고는 모든 것을 동시성 위에서 동질성과 분석적으로 보는데 시간의 본질은 이질적 지석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물질적, 객관적이 아니라 내재적 의식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소광희 『시간의 철학 성찰』, 1966, p.402.
라고 지적했다. 미래주의 미술이 지향하는 시간은 비 객관적 시간이 지배한다. 움베르토 보치오니 이탈리아 화가겸 조각가, 1882년생, 미래주의 조각의 기술선언.
나 지아모코 발라 이탈리아 화가,조각가, 무대디자이너. 1971년생. 미래주의 미술운동의 주역.
의 작품에서 움직임은 연속성의 표현으로 사진에서 차용된 회화이지만 사진 기술과 차이를 보인다. 베르그송의 지적처럼 미래주의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시간의 연속성은 물리적 시간이 아니다. 이는 회화 제작의 특성상 작가의 주관적 해석에 의한 심리적 시간으로 분석해야 한다.

필자는 사윤택 작가의 작업을 위해 그와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를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 그 이자 그의 작업이다. 오랜 전부터 느끼며 보아왔던 그의 그림들은 그림 안에 작가가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작가 자신이 있지 않았다. 한때 그는 화면의 시각을 흐리게 하여 자신의 예술가적 삶과 유리되지 않은 자아를 표현하였다. 지나치게 시각을 외면하거나 혼돈을 주는 작업으로 요즘의 블러blur 기법의 캔바Canva 프로그램처럼 표현하여졌다. 있거나 없는 혹은 아예 있지 않은 자아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그는 일반적 삶의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에서 그림이 나온다. 그의 말이다. 자화상처럼 보이는 소년이나 남자들 역시 자신의 현재 상황을 연출하는 기법에서 멀지 않은 것 또한 자아와 비자아가 등장으로 보인다. 화가가 자아를 등장 시키는 일은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사윤택의 그림에서 자아는 비자아의 조형으로 보인다. 이유는 사실주의 미술이나 혹자 인상주의 미술의 해석에서 상당히 비켜나 있기 때문이다. 자아를 비자아화하여 성의 정체성 본질에서 혼란스럽게 하는 여성의 등장이 비자아를 자아화 하는 화면을 위한 도구 즉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작가가 자아철학에서 나타내려는 실증적 자아 찾기의 과정으로 보인다. 자아는 변증법으로 자아는 원인과 근거의 자아에서 정신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최초의 자아이자 최종의 자기이다. 이미 자아가 되면 스스로 분열을 한다. 비자아를 설정하여 자아를 찾는 과정으로 진화 한다. 결국 자아는 자아가 아니다. 한자경, 『칸트와 피히테에서 대상과 자아』, 철학연구회, 1998.
라는 모순이 성립된다. 아니다는 그렇다의 테제를 찾아 자아와 비자아는 대립하되 인정을 하며 절대 자아로 성장한다. 작가와 작품이 분리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성의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작품의 존재성에 자아가 깊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농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자아가 통제되면 비자아가 활개를 친다. 비자아를 가두면 자아는 창조적이지 못하다. 사윤택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서 이성의 자아를 등장시켜 관객이 관객 자아를 의심하게 하는 심리적 효과를 유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상은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에너지이다. 예술작품에서 에너지는 공간의 이탈이자 행위의 궤적이다. 궤적은 절편이다. 사윤택의 작품 ‘별 헤는 밤’, ‘점에서 점으로’, ‘순간의 기억들’에서는 수없이 많은 궤적의 중첩으로 절편화 되어 있다. 사윤택의 등장인물은 시간과 시간의 대립으로 공간을 지배하는 들레즈의 절편성으로 견고함과 유연함이 상대적이지 않게 배열되어 있다고 보여 진다. 포스트모던의 시간성은 그 명료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시각을 지배하지 못한다. 이미 고대 그리스의 철학에서 ‘어떤 감각도 시각 이상의 감각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시각이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발견하게 되면서 시각미술 수용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확장과 해체를 시각 외적인 곳에서 찾는다. ‘눈은 육체적인 눈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이성, 즉 정신적인 눈이다’ 데카르트의 학설 고키토, 생각하다의 라틴어.
라는 학설이 데카르트에 의해 주장되면서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는 시각의 의미가 달라진다. 시각 중심주의가 위기를 갖게 되는 이론으로 절대적인 시각 중심주의에 대한 저항이자 파괴로 규정을 하기도 하였다. 임윤수, 『시각중심주의의 해체로 본 현대미술의 양상연구』, 한국일러스트아트학회, 2022.
순수 미술의 영역간 경계는 근대 이전으로 공간이 지배하는 환경에서의 가능했다. 시각을 다른 감각보다 우위에 두었던 이론들이 물리적 시각과 정신적 시각으로 분리하는 포스트 모던적 사고는 철학사회 뿐 아니라 미술사회 환경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체계가 사회적 시각성을 포함하자 미술의 다양성은 파괴되고 무시되는 탈 경계의 전이 된다. 사윤택이 그의 그림 안에서 질서를 파괴하고 시각의 차원을 재현에 머물지 않는 것은 미술사에서 다루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주체적 환경을 구성하는 회화의 차원은 시간을 동작이라는 얼굴성으로 적용한 그의 작업은 감각의 시각화라 평가 된다. 현대와 현대성의 시각체계를 시간의 단절로 정확한 타자의 심상시각을 회화에 적용하여 그 풀이 과정은 복잡한 방정식의 해법 과정이기도 하다. 필자가 사윤택의 시각주의나 타자에 의한 자아 해석의 해체를 넘나들며 이야기 한 것은 근대사회가 수용하기 거부한 타자성, 혹은 비자아의 고민들을 발견했기에 때문이다. 잘 그려진 그림이 아닌, 화면의 구성과 사물 배치의 어색함에서 기 학습된 시각주의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도 작가의 의도를 찾기 위한 노력도 현대 미술을 수용하는 과정 일 수 있다고 본다. 사윤택의 ‘졸고 있는 소년’ 시립미술관 전시에서 잠과 졸다는 것의 경계인 졸고 있음은 사유의 세상 그 언저리에서 동시성(공시성)이다. 각각의 관계를 가지는 두가지 일들이 동시에 발생했을 경우 이 둘은 연관관계도 없지만 실제로는 우연이 아닌 비과적 법칙이 있있다. 개체 인간의 심성 속에서와 현실세계의 사이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졸고 있지만 잠이 아닌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비인과론적인 미학적 증명은 사윤택이 사유하는 개인의 우주관이 유기적으로 자아와 비자아를 넘나드는 상관적 창작의 시간이다. 그는 졸고 있지 않았다.










참고자료

질 들레즈, 펠릭스 기타리, 『천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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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자료 : 작가 제공, 필자 전시장 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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