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의 그림세계 : 세계 내 관계적 인간이자 욕망하는 주체로서 인간 존재에 관한 서사
강기훈은 도시 속의 인공낙원 ‘식물원’이라는 낯선 풍경들을 대형캔버스에 옮겨왔다. 일련의 그림들 각각은 시점이나 작풍에 있어서 일관성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마치 영화의 결정적 순간의 장면만이 정지화면으로 기억에 각인되듯이, 영원한 순간으로서의 강렬함을 발한다. 그는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과 생생한 인상을 담은 파편적 단상들 간의 몽타주로 작가적 서사를 엮어가고 있다. 이는 기승전결의 결론맺음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아닌, 문제상황을 영원히 진행 상태로 다루는 서사 구조이다. 이처럼 독특한 구조의 그림세계를 통해서 강기훈은 작가 자신 뿐 아니라 보는 이에게도 ‘이질적인 시간과 개체 영역들이 교차하고 중첩되는 공간’으로서 현재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키고, 다층적 복합체로서 세계 내 관계적 인간과 욕망하는 주체로서 개별 인간 존재에 대한 반성적 사유와 성찰을 이끌어가도록 한다.
강기훈은 2005년 남산 식물원 유리온실 방문 당시의 지극히 사적인 인상과 작가적 문제의식에서 창경궁의 식물원과 대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식물원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제화된 근대적 공간’이자 ‘인공적으로 옮겨진 식물들과 그들의 왕성한 생명력, 그리고 이식(移植)과 관상(觀賞)행위에 투영된 다양한 욕망들이 뒤얽힌, 갇힌 볼거리 공간’이라는 역사·사회문화적 유형으로서 상징적 의미를 확장시켜왔다. 그런데 강기훈의 ‘식물원’이라는 특정 주제에 대한 관심은 과거 역사적 공간들의 유형학을 위한 다큐멘터리 작업과는 차별화된다. 그는 기계적이고 획일적인 수집이나 분석에 관심이 머물거나, 그 과정적 결과물인 자신의 그림이 도식화된 유형이나 관념 틀로서 자신의 시선을 가두는 사태를 경계하는 듯하다. 즉, 객관적 대상화나 동일시, 동화 혹은 성급한 작가 판단이나 결말짓기를 경계(警戒)하며, 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경계(境界)에 자신의 그림세계를 펼쳐낸다. 작가 강기훈은 그림행위의 주체와 대상, 화면 내부적 요소들, 그림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에 치밀하게 긴장 관계를 설정해가며, 그에 따른 시점과 관계거리, 그리고 그에 적합한 작업스타일의 차이와 변화를 시도해왔다.
예를 들면, 원색의 강렬한 대비와 기하학적 프레임 구획의 구조물, 극적인 원근배치 등으로 우연히 마주한 식물원 외관의 압도적 인상과 생경함을 전달할 뿐 아니라, 이러한 사적인 체험들을 익명화한다. 그런가 하면 식물원의 관람객 행렬을 따라서 원색 그리드 구조의 후경과 사실적 전경을 대비적으로 묘사한 내부를 탐색하도록 보는 이를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밀폐된 공간 안에 빽빽하게 이식되어 식물들의 꿈틀거림을 사실적으로 정교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며 주부(主部)와 상하좌우의 위계 없는 올오버의 화면으로 숨 막히게 전달하기도 한다.
강기훈이 하나의 사태로 옮겨낸 화면들 각각은 넘치는 개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기묘한 느낌을 전한다. 지극히 명료하면서도 애매모호하며, 사실적이고 생생하면서도 동시에 몽환적이다. 한마디로 그로테스크하다. 대상으로부터 오는 시각적 압도감과 대상에 대한 매혹과 집착, 대상과의 단절과 소외 등. 강기훈은 그로테스크함을 단번에 풀리지 않는 대상을 둘러싼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문제의식들을 긴장감 있게 엮어가며 자신만의 회화적 서사를 이끌어가는 흥미로운 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나 식물원 안에 이식된 식물들과 더불어 있는 작가_애초에 자신의 그림 대상이었던 식물원의 구성 일원으로서 화면 밖 현실 공간의 우리와 대면하는 무표정한 작가-의 낯선 풍경 그림은 작가적 문제 상황을 관객에게 되묻는 극단적인 그로테스크 전략이다. 작가 강기훈의 관심과 시선을 따라서 일련의 그림 공간 안으로 초대되었던 관객은 그야말로 순식간의 반전과 충격을 경험한다.
최근 강기훈은 식물원이라는 가시적인 실체에서 비가시적이지만 건국신화와 같은 문헌상의 기록이나 전설, 설화 등 구비신화 등이 전승되는 역사적 실체로서 특정장소들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 곳에서의 신령한 느낌들과 허구와 실재를 넘나들며, 시대를 관통하는 의미를 발생시키는 애매모호한 경계지점.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자신의 그림세계에 또 다른 차원과 새로운 층위의 서사구조를 더하고 있다. 갈등적 대립관계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서사구조와 갈등요소들을 길항관계로 공존시키는 신화의 서사구조를 결합시키려는 듯하다. 최근의 이러한 시도는 자신이 처한 소통의 어려움과 한계 상황을 고백하듯 진솔하게 담아내는 강기훈의 그림행위들을 관계적 존재이자 자율적 주체로서 화해와 조화로운 공존을 향한 경계지점에서의 사유와 몸짓으로서 보게 한다. 여전히 진행 중이며 영원한 진행상태인 강기훈의 그림세계에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현재적 사유와 작가적 비전으로서의 가능성을 기대해 본다. 조성지/ CSP111아트스페이스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