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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Park Gwang Soo : 반허공 Mid Air Park Gwang Soo : Mid 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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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명
  • 전시기간 2013-01-24 ~ 2013-02-06
  • 전시장소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전시개요

박광수 : 악몽의 절단면

인사미술공간에 전시된 박광수의 근작은 하얀 벽 또는 종이 위에 검은 잉크로 그린 드로잉들, 그리고 그것에 내재된 시간성이 보다 직접적으로 펼쳐진 애니매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액자 없이 붙여놓은 드로잉들의 차이를 둔 반복은 그 잠재된 움직임 때문에 애니매이션 원화 같은 느낌도 준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에서 어떤 행동이나 그 의미에 대한 명확한 기원과 목적은 찾을 수 없다. 찰라의 순간들이 반복되는 움직임은 행동이라기보다는 진동으로 다가온다. 그것들은 고정된 이미지에 맥박이나 호흡을 불어넣지만, 건강함의 징후인 고른 진동은 아니다. 미세한 떨림부터 패닉 상태에 이르는 진동은 살아있음에 대한 최소한의 징후이다. 비스듬히 놓여 진 탁자 위에 투사된, 외발로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남자 영상처럼,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지상 위에 발디딜 단단한 토대가 부재하다. 대부분 배경 묘사가 생략되어 있는 형상들 역시 고립과 단절감을 강조한다. 분리된 각각의 세계는 여러 단계의 매개를 거쳐야 가까스로 연결된다. 다소간 두서없이 나열된 그의 이야기는 쉽게 소통되지 않는다.

모서리에 투사된 또 다른 영상을 보면, 인간은 침대에 누워서도 무엇인가 앓고 있는 환자처럼 휴식을 취할 수 없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매 순간에 흔들리는 존재이다. 그러나 무엇이 그를 흔들고 있는지에 대한 선악 이분법은 전제되어 있지 않다. 그의 흑백 화면은 흑백 논리와는 거리가 있다. 작가는 영지주의자나 실존주의자처럼 지상에 던져진(추락한) 존재의 선천적 운명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흔들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같은 고전적 표현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행동하기보다 진동하듯이, 생각하기보다는 꿈을 꾼다. 그의 작품에서 행동과 생각의 중심은 삭제되어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없었거나 지금은 사라져 있다. 삶의 불안정한 조건은, 바탕에 흡수되어 안착되는 선이 아니라, 백지 위에 쓱 얹어놓은 듯한 잉크의 궤적으로 나타난다. 딱딱한 스폰지를 잘라 만든 수제 필기구에 잉크를 묻혀 그린 선들은, 때로는 멈칫거리며 때로는 죽죽 나아가면서 무의식과 꿈을 그대로 전사한다. 근육의 떨림을 그대로 전달하는 그의 수제 필기구는 몸과 그림을 붓보다 더 밀착시킨다.

박광수의 작품에서 일상의 단편들이 확장되는 방식은 끝말잇기와 같아서 다음에 연결, 접속될 것들을 예측하기 힘들다. 흑백 화면은 명확함만큼이나 불명확하다. 종이 위에 잉크 드로잉이라는 일관된 형식에 형태, 또는 의미의 유사라는 원칙으로 이미지들이 증식되는 최소한의 규칙만이 관철되고 있을 뿐이다. 가령 지하에 전시된 작품 중에서, 마법처럼 떠 있는 돌, 그것과 비슷한 형태의 두 손, 비슷하게 딱딱한 표본벌레 등이 한데 배치된 것들이 그렇다. 1층 벽에 그린 [숲], 위에 배치된 [불의 열매], 그리고 추락 하는 남자 등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야기를 만든다. 1층에 등장하는 불타는 사과는 지하 전시장 벽으로 떨어진다. 다른 종이에 그린 것들이 한 화면에 그린 것처럼 나란히 배치되어 있기도 하다. 배경의 삭제는 단자(單子) 같은 세계의 연결과 접속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한다. 단절은 역설적으로 절묘한 연결을 추동하기도 하는 것이다. 꿈속의 사물이 그러하듯이 이리저리 건너뛰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연결고리가 있다. 불타는 베개 위에서 곤히 자고 있는 남자의 초상을 그린 [man on pillow](전시부제)는 아래에서 날름거리는 불길이 자는 남자를 전소시킬 만큼 위협적이며, 주름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선과 함께 그가 악몽을 꾸고 있음을 알려준다.

 완성과 미완성의 경계가 애매한 드로잉이라는 형식은 꿈이라는 내용과 어울린다. 그것은 무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자동기술을 애용했던 초현실주의자의 방식과 유사하다. 박광수의 작품에서는 꿈과 현실을 구별할 수 없다. 꿈과 현실을 요소들이 교환되거나 약간의 비틀림이 이러한 혼돈을 자아낸다. 양자는 특히 악몽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검은 먹구름이 가득 끼어있고, 불타고 흔들리며 추락한다. 인간은 물론, 섬광이나 달조차도 조각난 채 아래로 처박히는 추락 이미지는 심연과도 같은 꿈과 무의식으로의 하강을, 그리고 현실적으로 당면한 위기를 동시에 암시한다. 작품 속 인물이나 은유적 대상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새처럼 아예 무표정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시련을 통과하는 중이다. 급작스럽게 닥친 시련들은 꿈이라고 생각해야 견딜만하다. 그러나 어두운 현실은 꿈에서도 계속된다. 그것은 그가 꿈과는 무관할 수 없는 일, 즉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검은색 선으로 그린 깊은 잠이나 추락의 이미지는 죽음에 근접시킨다. 이 모든 은유들을 한 얼굴로 압축한다면,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검은 새가 될 것이다. 새는 날지 않고 웅크리고 있다. 깃털로 감싸인 존재임이 무색하게 바위처럼 묵직하다. 날지 않는 새는 달리지 않는 자전거처럼 취약하기 그지없다. 검은 새는 우주로부터 쇄도하는 적대적인 힘을 피하기 위해 검은 망토 같은 그림자로 위장하고 있는 듯도 하다. 이 반(反) 표상적 형상은 세상을 향한 행동과 의미 부여를 철수한다. 꺼진 촛불을 응시하거나 내부로 잔뜩 움츠러든 새는 검은 바위 같은 절대적인 무감각의 상태에 놓여있다. 작가에 의하면 이 새의 정체는, 시작은 까치였는데 그리면서 까마귀가 되었다. 새머리에 검은 단추같이 박힌 눈깔은 어떠한 감정 표현도 없이 주변을 온통 감싸고 있는 지상의 암흑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비명인지 침묵인지 모를 검은 덩어리를 삼키고 있는 꼭 다문 입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여기와 저기를 잇는 새는 여기도 저기도 아닌 매개지대에 놓여 있다.

그가 곧잘 그리곤 하는 불, 구름, 얼음, 섬광, 폭발 같은 현상은 끝없이 변형 중인 물질과 에너지의 상태를 나타낸다. 형태와 경계 위에 놓인 존재는 초월적이면서도 위험하다. 하얀 바탕을 활주하는 검은 선은 분명한 경계를 만들어내면서도 그것을 흩트린다. 가장자리가 풀려나가는 편물처럼 개체의 방어막은 와해된다. 정리되지 않은 선들은 온전한 개체화를 침해하고 교란시킨다. 외곽선은 형태를 확정짓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더듬더듬 만지듯이 형상화 한다. 형상이 선의 연장이라면, 그는 굳이 정확한 선을 그리려 하지 않는다. 제 갈 길 잃은 선들은 그대로 방치되며, 동일한 시리즈 내부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 차이는 고정된 형태를 진행 중인 과정으로 만든다. 작품은 완결될 수 없는 꿈처럼, 그리고 현실 그 자체처럼 수습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드라마나 동화 등에 흔히 나타나는 서사 구조인 해피엔딩이나 권선징악과 달리, 그의 꿈과 현실은 끝을 맺지 못한 이야기의 흔적들로 어지럽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 순간을 상징하는 흔적들은 그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다. 형상화를 위한 가장 직접적인 단계인 드로잉을 선호하는 그에게, 드로잉은 본격적인 회화를 위한 밑그림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대상의 모방이 아닌 직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사의 언어로 비유를 확장시킬 수 있는 구체적 대상을 완전히 생략하지는 않는다. 그는 수첩과 필기구를 늘 소지하고 다니면서 낙서하듯이 생각과 느낌을 자아내는 소재들을 그린다. ‘냅킨 한 귀퉁이에 그린 약도 같은’ 평소의 스케치들은 전시를 위해 100호 크기로 확대되었을 때도 그 밀도와 강도를 잃지 않는다. 종잡을 수 없는 꿈을 보정 없이 바로 찍어 낸듯한 작품들은 컬러가 아닌 흑백이다. 죽은 듯이 깊이 들어버린 잠 속에서 지상의 다채로운 색은 흑백으로 환원된다. 흑백은 드로잉이라는 형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분명 어떤 강렬한 감정을 낳는 색이며, 특히 어둡고 우울한 느낌을 자아낸다. 추락중인 도상들과 연결된 검정은 죽음과 고통을 연상시킨다.

가령, 1층에 숲을 그린 벽화는 푸른 숲을 검은 선으로 묘사한 것이기보다는 숯덩이로 변한 불타버린 숲이 떠오르며, 검게 그린 새는 길조(까치)에서 흉조(까마귀)가 되었다. 구름이나 달 같이 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낭만적 소재들 역시 수채 구멍에 모인 머리카락처럼 지저분한 선으로 죽죽 그어져 있다. 블랙은 세상을 부정하는 비관적이고도 금욕적인 색이다. 상복이나 수도자의 옷에서 나타나듯이 흑백은 세속으로부터 벗어난 색 아닌 색이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검정은 화려한 색의 긍정적인 의미를 그 반대로 변화시킨다고 본다. 검정은 낮과 밤의 차이를 만들 듯이, 가치를 전환시킨다. 박광수의 작품에서 쌍으로 전시된 반전 이미지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에바 헬러는 모든 것은 검정으로 끝난다고 본다.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는 검정 옷을 입고 있다.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을 때도 ‘blackout’ 이라고 한다. 검정에서 배어나오는 정서는 허무와 무의미이다. 박광수의 작품에서 블랙은 단호함이나 엄격함 보다는 머뭇거림이나 우울함에 가깝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삶에 있어서 근심과 무능을 동반하는 멜랑콜리가, 삶을 죽음 속에 밀어 넣고, 삶과 죽음 사이에 어떤 공간도 남겨 놓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멜랑콜리는 대상으로부터의 분리로 야기된다. 일련의 분리에는 탄생, 젖떼기, 어머니와의 분리, 욕구불만, 거세 등이 포함된다. 크리스테바는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정신분석은 일련의 분리를 자립화의 절대불가결한 조건으로 인정하며 상기한다고 지적한다. 현실적이고 상상적인 이 분리작용은 필연적으로 개체화를 구축한다. 작가는 상실된 대상을 기호와 이미지로 되찾으려 한다. 박광수에게 그것은 치유이면서 동시에 상처를 덧내는 이중적 과정이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버림받음과 새로 태어남을 동시에 야기하는 단절감을 무대화한 수난극이다. 상상세계의 기층에 깔린 멜랑콜리는 예술가적 자아에 고유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빛낼 역설적인 어둠을 낳는 멜랑콜리는 작가에게 변수가 아닌 상수인 것이다.  이선영/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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