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희의 작업세계- 위태로운 허상의 위로
소통의 가능성을 찾아
김종희는 현실에서 체감한 부정적인 면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작업에 담금질해 온 작가다. 2009년 이래 명쾌한 단어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감정들, 특히 진실을 가린 인간의 감정에 몰입했다.“사회제도, 그로부터 생긴 문화의 틀, 잘못된 선입관과 개혁에 대한 경계와 비판이 창작에 이유 있는 열의를 불어 넣어주었다”고 하는 그는 주변에서 경험했던 부정적 상황들을 냉철하게 꼬집는다. 2010년 대구 신진작가 발굴 프로젝트에서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사사로운 감정을 영상작품으로 선보인바 있다. 그중에서도‘화’와‘회의심’을 조명했다. 2012년 대안공간‘싹’에서는 자연(숲)을 소재로 한 가공된 삶에 대한 회의를 영상설치로 보여주었다. 우리의 삶에는 부정과 긍정의 양면이 있다. 좋고 나쁨, 옳고 거름, 착하고 악함 등. 이분법적 분별심은 곳곳에서 우리의 많은 것을 좌우한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두 면을 인간이 임의로 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정할 것은 우리가 여기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가끔은 그런 척을 하거나 위선도 묵인한다. 위선은 다분히 가공된 것이고 배려는 진심에서 나온 선행임을 알지만 경계점을 분명히 가리지 않는다. 감정 본연의 모습을 감춘 인간은 진실을 은폐하거나 양심을 속이는 행위에도 곧잘 동조하곤 한다. 김종희 작가는 이처럼 감정표현에 솔직하지 못한 인간의 태도를 예술로 지적한다. 그의 이러한 비판적 시각화는 지극히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일지라도 소통에 대한 예술적 시도였다고 할만하다.
벗겨낸 감정
그는 이러한 작업들을 주로 화가 날 때 했다고 한다. 때문에 저변에는 비판적인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핵심은 부조리한 사회와 부정적인 인간의 감정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비판적이라 하여 반드시 과격할 필요가 없듯, 그의 표현법은 오히려 잔잔하다. 예컨대 사람의 머리에 곤충의 두상을 대입시킨 <욕>이나 귀여운 캐릭터와 글자로 상황을 설명한 <항상 그랬어>, 그리고 소통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두 소녀의 흑백잔상 등, 대체로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영상을 선보였다. 그러나 경계를 허물고자한 그의 이러한 시도는 종종 관객과 작품사이에 새로운 벽을 형성한다. 관람자들의‘이게 뭘까?’라는 질문이 말해주듯 소통을 의도한 창작언어가 소통의 난제를 야기한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조차 작업의 연장으로 여기고 관람자들을 작업에 참여시킨다. 예컨대 바닥에 제시해놓은 화살표시를 따라 걸어보게 한다거나 신발을 벗고 작품위에 올라가서 변하는 화면을 경험하게 하는 등, 참여형 미술을 전개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점은 남는다. 창작이 준 새로운 숙제다. 이것은 난해한 현대미술의 단면이면서도 작가가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나 벽은 있게 마련이어서 완전한 소통은 어렵다. 작가는 그것을 벗김으로 제시한다. 벌거벗음은 잘남 보다는 못남을 드러내는데 의미가 있다. 이때 얻게 되는 장점은 못남에 개의치 않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몰입한 그의 작품은 네이처리즘(나체주의)을 연상시킨다. 20세기에 전개되었던 네이처리즘은 잘 다듬어진 나신의 관능미보다 몸을 가장 자유로운 상태로 풀어주는데 주력했다. 예술작품이 정신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때, 마티스나 고갱이 야만의 이브를 찾아 원시자연으로 들어간 것은 순수의 원형을 보고자 함이었다. 그들이 원시 자연에서 긴장과 치장의 문명으로 휘감은 몸을 벌거벗겼다면, 김종희 작가는 맑은 망막을 가린 불투명한 우리의 감정을 벌거벗겼다고 하면 어떨까. 때문에 그의 감정 벗김은 과제를 남기면서도 새로운 소통의 시도였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예술적 유희와 박재된 자화상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예술의 기능 중 하나는 유희를 통해 삶을 직시하는 것이다.“장르나 역사를 아울러 모든 것이 미술이 될 수 있는 현대미술의 가능성에 매력을 느꼈다.”고 하는 김종희 작가에게는 예술이 곧 유희다. 그의 유희는 현대미술이 차용한 디지털 기술의 혜택을 입는다. 현대는 실재와 원본이 무너진 시대다. 영상에 의한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 실제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현실과 가상, 원본과 모사물의 경계가 사라진 디지털 세계를 경험한다. 허구의 세계가 얼마나 독특한 세계의 지평을 마련하는지는 다양한 예술 작품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디지털 화면 속에서 인위적인 창조를 하는 그에게는 이러한 현대미술이 곧 유희이다. 그러나 예술정신과 디지털기술의 접점이 그이 꿈 어디까지를 만족시켜줄 것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삶이 주는 영원함은 없다. 예술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유희만으로 이루어 질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술은 무한의 꿈을 허용하면서도 유한의 현실을 간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는 작가는“예술에 대한 이상이 클수록 현실은 생각만큼 쉽지 않고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힘들고 외로운 삶이 될 것”이라고 토로한다. 이러한 길이 위태로운 줄타기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처럼, 작가는 꿈을 담보로 현실과 고립되어 이른바 순수한 창작에 몰입 된 현재를 고민한다. 그리고 그 긴장의 틈새를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오늘을 사는 예술가(또는 인간)의 무력감과 좌절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지난 2012년 9월 대안 공간 싹에서 보여준 <위태로운 허상의 위로>는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이 드러난 작품이라 하겠다. 인공의 빛(조명)과 녹음된 자연의 소리가 지친 영혼들에게 위태로운 위로를 하던 어두운 지하 공간, 실재와 가상이 공존하던 그곳에는 마치 숲의 일부를 들여 놓은 듯 식물이 가득했다. 그러나 나무는 서서히 시들어 갔고 녹음된 계곡의 물소리는 타들어가는 식물들에게 갈증을 부추겼다. 스크린에서 흔들리던 나무는 생명을 박재당한 조작된 현실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은 가상과 현실, 거짓과 진실의 경계점에서 흔들리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작가는 이분법적 규준에 길들어진 우리가 진정으로 찾고 지키고 추구해야할 것을 되묻는다. 예술의 길은 멀고 더디다. 그리고 숨이 멎는 날까지 과정이다. 꿈과 현실이 버무려진 김종희 작가(또는 우리)의 유희도 흔들리는 과정이다. 그러나 냉철한 통찰력과 진지한 삶에 대한 고민으로 거듭날 작가의 창작적 열의와 가능성이 기대된다. 서영옥/ 미술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