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HEONGJU MUSEUM OF ART 전시

지난 전시

홈 전시 지난 전시
기획전
성정원 Sung Jung Won : 일회용 하루 disposable days Sung, Jung Won : disposable days
대표이미지 보기
닫기

전시
안내

  • 작가명
  • 전시기간 2013-10-24 ~ 2013-11-03
  • 전시장소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전시개요

성정원 : 모든 하루는 언제나 일회용이기에...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성정원의 <일회용 하루>의 설치사진을 보고, 잊고 있던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를 새삼 떠올랐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라 하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겨울이면 동네 골목마다 연탄재들은 차곡히 쌓여 있었다. 화가 나는 일이 있는데 화풀이 할 때가 없을 때, 사람들은 심심치 않게 연탄재를 발로 차곤 했었다. 한 때는 활활 타면서 방안을 따뜻하게 덥혀주던 그런 연탄이었지만, 다 타고 남은 연탄재는 천덕꾸러기였다. 시인 안도현은 물었다. 너는 언제 한 번 그렇게 누군가에게 온기를 주었던 그런 사람이었냐고. 스스로를 태워가며 온기를 전해주었던 연탄재는 네가 그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세 줄 밖에 안 되는 이 짧은 시에 많은 사람들은 감동했고, 저마다 가슴 한켠 찔려했었다.

성정원 작가를 ‘일회용 종이컵’ 작가라고 불러도 좋을까. 작가는 썩 내켜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성정원은 그렇게 불릴 수도 있을 만큼 꽤 오랫동안 ‘일회용 종이컵’을 고집해왔다. 2011년, 2013년 갤러리 룩스에서의 전시 <반복재생>과 <Can you hear me?> 그리고 2013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의 <일회용 하루>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주요 모티브는 언제나 ‘일회용 종이컵’이었다. 물론 매번 그녀가 바라보았던 ‘종이컵’은 조금씩 다른 모양이었다.  <반복재생>에서 작가는 ‘종이컵’을 무엇인가를 담아내는 용기(容器), 그릇이라는 측면에서 집중했다. 스스로에게 빈 공간을 허(許)함으로써, 다른 것을 담아내는 이율배반. 어느 평론가도 언급했듯이 그래서 종종 사람의 인격은 그릇에 비유되고, 그런 면에서 성정원의 컵은 분명 인간 육체의 은유라고까지 확대해서 해석할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disposable no. 20110306 dunkin' dounuts'나 ’disposable no. 20110306 the coffee bean & tea leaf‘와 같은 비디오 작업은 단순히 자신이 사용한 종이컵을 모아 보여주었던 사진작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작가가 종이컵을 보는 시점을 새롭게 시사한다. 우선 이 두 비디오 작업에는 종이컵은 등장하지 않는다. 종이컵의 외양을 한 가짜 컵. 작가가 흙으로 만든 하얀 컵에는 던킨 도우넛과 커피빈의 로고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컵 안으로 커피를 따른다. 초벌조차 되지 않은 흙으로 만들어진 가짜 컵은 커피를 담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커피는 서서히 밖으로 배어 나온다. 그리고 컵의 형체는 부서지고, 무참히도 작가의 손은 그 컵이 애초에 돌아왔던 흙의 모습으로 주물러버린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몸을 연상시키는 것이 과한 해석일는지 모르지만,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종이컵과 일회용 컵들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통해 종이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조금이나마 변화가 생겼음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Can you hear me?>에서의 종이컵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드러난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고나 할까. 이 전시에서 성정원은 컵의 용도로서의 종이컵이 아니라, ‘소통’ 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도구로서의 종이컵을 가져온다. 고즈넉한 전시장 한 켠에 설치된 종이컵 전화기는 친구들과 종이컵에 실을 매어 만들어봤던 종이전화기 놀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들릴지 궁금하게 한다. 종이컵을 집어 귀에 대면 들려오는 ‘뚜우~ 뚜, 뚜우 뚜’ 모르스부호. 알아들을 수 없는 모르스부호는 “조용히 해주세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엄마, 아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전시장 벽면에 설치된 모르스부호가 전화기속 사운드에 대한 실마리인 듯하지만, 알아채기 쉽지 않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린 어쩌면 누구의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뱉어내는 무수한 말들은 누군가에게 해독되지 않은 모르스부호 같은 파장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두 전시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종이컵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이어지면서 작가 성정원이 일상을 보는 시각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일회용 하루>에서 그 내용은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2008년부터 작가가 직접사용하고 수집한 일회용 컵들을 촬영한 사진이 전시장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똑같은 일회용 컵이더라도, 그날 성정원의 하루에 들어온 이상, 그 컵은 다른 컵과 달라진다. 공장에서 대량생산되어 나왔을지 모르지만, 대량생산된 컵 중 하나가 아닌, 오로지 하나 뿐인 컵으로 변한다. 그저 그런 컵이 아니라, 작가의 일상에 대한 기록이고, 컵이 겪은 사연에 대한 기억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성정원의 일회용 종이컵에 새로운 이야기가 입혀진다.

새삼 ‘일회용 하루’라는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다. 어찌 보면 모든 하루는 일회용이다. 하루하루가 비슷해 보이고, 지루해 보일지 모르지만, 하루는 늘 언제나 일회용이다. 그러고 보니 일회용이라는 것이 그저 쓰고 버린다는 의미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 일회용이기때문에 더 맘이 쓰일 수도 있고, 일회용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일회용이라는 것은 그래서 유일무이한 것이 된다. 성정원의 종이컵이 여느 종이컵과 달라지는 것처럼. 환경보호를 빙자하여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가는 시절에 종이컵 예찬은 뜬금없어 보인다. 종이컵을 줄이자는 운동도 있는데, 작가는 종이컵을 ‘애용’한다. 물론 이미 살펴보았듯이 성정원의 일회용 종이컵과 관련된 작업들은 하나로 묶어 이야기하기에는 바라보는 지점들이 사뭇 다르다. 그릇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여, 그것은 인간의 몸, 좀 더 나아가 삶과 죽음에 대한 은유에까지 이어지고, 소통에 대한 물음으로 전개되었다가, 다시 일상에 대한 기록으로 돌아왔다. 이런 방식이라면, 아직도 종이컵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많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앞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산만하지 않고 밀도 있게 어떻게 작업으로 풀어낼 것이냐는 지점이다. 단순한 디자인의 하얀 색 종이컵. 그것은 여느 컵들이 그렇듯이 아직도 많은 것을 담을 준비를 하고 작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자칫 그 이야기는 종이컵의 모양처럼 너무 단순하고 일차원일 수 있다는 것이 성정원이 늘 긴장해야 하는 지점일 것이다.
다행히 그동안 성정원 다양한 작업을 통해서 ‘종이컵’을 보여 주었다. 사진으로, 설치로, 영상으로, 그리고 점토로 만든 페이크 종이컵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 종이컵은 종이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그의 작업을 종이컵에 대한 이야기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오히려 일상의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친숙한 종이컵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상의 이야기다. 일그러지고 쪼개지고, 마모되고, 소비된 종이컵은 언제나 일회용인 우리의 오늘 하루이다.

언젠가 활활 타오르며 온기를 전했던 연탄재를 노래한 안도현의 시처럼,
지치고 힘들었던 하루에 온기를 따뜻한 커피한잔 전해주었던
종이컵에 대한 성정원의 시선이 사사롭지 않음은
오늘 우리의 하루 역시 일회용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소개

 

부대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