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무표정에 담긴 현대미술
김수영은 2011년 대학졸업작품으로 처음 인형을 제작해 선보였다. 당시의 작품 <끝과 시작 사이에서>는 실재 인체 크기(170×120×180㎝)로 자이언트 페펫이라 부르기에 어색하지 않았다. 다양한 문양의 천을 이어 붙여 제작한 인형은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전시장 한 켠에 둥그런 눈을 뜨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때의 첫 작품으로부터 시작된 지금의 인형설치작업을 살펴보기에 앞서 한 가지 상황을 상상해보자.
기저귀를 갓 벗어난 여자 아이 둘이 아기 인형을 안고 계단에 앉아 있다. 한 아이가 품안에 아기 인형의 배를 토닥토닥 쓰다듬는다. 한 아이가 장난감 우유병을 옆 아이에게 건네준다. 아이는 자신이 안고 있는 아기 인형의 입에 우유병을 물린다. 옆의 아이도 자신의 품에 있는 아기 인형에게 우유병을 물린다. 아이들은 그들 앞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어른을 향해 웃는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이야기를 한다. 아기 인형의 얼굴을 이러 저리 살피고 어루만지고 나서 아이들은 아기 인형을 조심스레 안고 계단을 올라간다.
아이, 특히 여자 아이를 키운다면 위와 같은 장면을 실제로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아기 인형을 마치 살아있는 생명으로, 그것도 아주 소중한 생명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을 보면 미소가 절로 난다. 사람과 인형의 따뜻한 교감을 다룬 영화가 있다. 픽사 애니메이션의 <토이 스토리>가 그것이다. <토이 스토리2>에서 사라 맥라클란(Sarah McLachlan)이 불렀던 <When she loves me>는 필자 마음에 온기가 필요할 때면 언제나 가슴에서 울린다. 필자 자신도 모르게 절로 노래를 부르게 된다. 자신을 위해서.
인간이 만든 사물 중에서 인형은 매우 경이로운 심리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 중 하나이다. 아동심리학의 일반적 견해에 따르면, 아기 인형은 아이들에게 인지력, 섬세 근육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있는 기술을 발달시킬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한다. 작품 해석이 본업인 필자의 눈에 인형놀이는 인형을 상대로 그리고 인형을 통해서 자신을 만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만나게 하는 일종의 중첩된 세계로서 은유(metaphorical) 세계인 동시에 실제(real) 세계이다.
아이는 인형과 함께 혼자서 또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드라마를 쓴다. 아이는 인형과 함께 쓰는 자신의 드라마 속에서 자신?친구?부모 그리고 세계를 모방한다. 인형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잠을 재우고, 옷을 입히고, 옷을 벗기고, 목욕시키고, 그리고 대화한다. 물론 감정을 나누고 위로한다. 무엇보다도 ‘왜?‘라는 질문을 하고 스스로 대답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그렇게 아이는 자신이 만든 융합(hyper-real) 세계에서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언어와 문법을 훈련한다.
인형이 만든 세계가 사랑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이의 인형놀이는 대체로 사랑과 생명을 매개하는 성장의 놀이로 나타나지만, 반면에 증오와 저주를 매개하는 죽음의 놀이가 될 수도 있다. 영화 <사탄의 인형(Child's play)> 연작은 죽음의 놀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살인범 찰스 리 레이는 공범인 에디 카푸토에게 버림 받고 쫒기다 형사 마이크가 쏜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신의 영혼을 근처에 있던 인형에게 ‘착한 친구(good guys)'라 부르며 복수를 다짐하면서 영혼-신체-전이한다. 유년기의 심성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접근할 수 있도록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는 신체(외모)로 바꾼다.
인형은 그것이 사랑의 주술이든 저주의 주술이든 힘을 지닌 매체가 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어느 경우이든 주술에 걸린 매체로서 해소되지 않은 욕망의 알레고리이다. 김수영의 인형을 읽기 위해 위와 같은 좌표축을 적용할 수 있을까. 김수영은 첫 번째 인형작품 <끝과 시작 사이에서>와 <겨울(2012)> 등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이목구비를 만들어 넣지 않았다. 첫 작품 이후로 크기도 작아졌다. 말 그대로 한 손에 잡을 수 있는 크기의 인형이다. 첫 작품에서와 달라진 것은 또 있다. 벨크로(velcro) 테이프를 관절접합에 적용했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러한 변화에 관심이 크게 가지 않는다.
필자의 관심은 작가가 인형 제작을 위해 천을 재단한 후, 천 조각의 연결부분인 솔기와 시접을 그대로 노출시켰다는 점에 있다. 둘째, 인형이 위치 할 수 있는 평범한 장소가 아닌 가상의 위치 설정과 연출을 시도한 점에 있다. 마지막으로 인형의 표정(이목구비)을 제거한 점에 있다.
작가는 천 조각을 연결한 재봉선과 너덜너덜한 실밥을 굳이 감추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마치 석고주형을 막 떼어낸 상태, 있는 그대로 접합의 비밀을 보여준다. 거친 상태를 의도적으로 마무르지도 않는다. 필자는 작가의 이러한 제작 태도와 표현이 어떤 의미를 지시한다고 결정할 수 없다. 필자가 의미를 규정하는 순간 작가의 작품은 표정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수영의 작품은 해석되지 않은 채 유보된다.
작가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평범하게 장식하고 있는 생활가구를 전시장으로 끌어들여 연출된 공간을 조성한다. 작가의 손에서 의도적으로 연출된 생활가구는 평범함을 잃는다. 작가의 의도적 연출에 의해 생활가구는 자체의 외형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관람객에게 낯선 심리적 거리감이 생성되어 이전 가구로서의 성격이 변형된다.
가구는 일상의 평범함을 상실하고 작가에 의해 조작되고 변형되어 감상자의 시지각적 집중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작가의 연출된 요구는 사실상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그래서 불편한 강요이고 강요된 집중이다. 그렇게 심리적으로 변형된 가구 위에 작가는 제작과정이 정제되지도 않고, 게다가 표정마저 제거된 인형을 설치해 놓는다. 그럼으로써 인형은 가구에로 강요된 관람자의 시선을 전적으로 넘겨받을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의미 해석은 계속해서 유보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나이?신분 나아가 성격 또는 태도 등 해석 자료로 기능할 수 있는 기호인 의상도 없고, 해석자를 더욱 곤궁에 빠뜨리는 것은 인형의 삭제된 표정이 의미 읽기와 규정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일반적 재봉의 관습을 거부하고 접합을 의도적으로 노출한다. 접합의 의도적 노출은 인형재봉에 앞서 작가 자신에 의한 어떤 해체의 단계가 있었음을 암시하거나 또는 아예 작가의 관념이나 계획마저 앞서 이미 거기에 해체가 있었고 작가는 그저 주어진 것을 받아 접합하였음을 암시한다. 작가에 의한 의도적 해체가 있었든 아니면 수동적으로 해체된 세계를 만났든 작가는 조각의 접합과정을 의도적으로 노출시켰다는 것이다. 작가가 감행한 접합의 의도적 노출은 적어도 작가가 수습 의지를 지닌 사람이라는 점을 관람객에게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의 인형은 수습과 치유의 의지에 관한 은유로 읽을 수 있다.그렇지만 수습과 치유의 작가적 의지는 어떠한 구체적 방향도 제안하지 않는다. 작가는 표정의 제거를 통해 감상자에게 이야기의 미완성과 의미 유보를 요구한다.
김수영의 인형놀이는 선과 악 또는 주술 같은 관습적 해석 좌표 위에 위치하거나 해석될 수 없다. 결국 작가는 의미해석의 유보를 연출함으로써 인형설치작업이 성장 동화가 아닌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박종석/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