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배 : 불안의 정체
그림자가 드리워진 구석진 자리에 한 여자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존재처럼 그 모양새가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아직 이차성징이 채 나타나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소녀는 그 또래들에게서 느껴질 만한 ‘생기’가 없다. 생기가 결핍된 소녀는 그 결핍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서정배 작가의 작품에 일관성 있게 등장하는 소녀들의 근원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가보면 2009년 프랑스 파리 체류 당시의 작업에서 ‘키키(Kiki)’라는 소녀를 처음 만날 수 있다. 키키는 작가가 만들어 낸 가상의 존재로서 비록 그 모습을 직접적으로 온전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몇 가지 묘사와 그 주변에 설치한 다양한 조형적 장치를 통해 그리고 키키가 경험하고 남긴 여러 결과를 통해 우리 스스로 그녀를 그릴 수 있었다. 키키는 소녀에서 ‘여성’이 되길 희망하며 일상의 관찰자이자 응시자로 그리고 여행자로 자신의 일상적 신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서울에 돌아온 이후 작가는 더 이상 키키의 여정을 기록하지 않는다.
이제는 이름 모를 ‘그녀’가 서정배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다. 그녀의 형체는 과거의 키키보다 시각적으로는 구체화되었지만 존재 자체는 더 미스터리하다. 작가는 그녀를 드러냄에 있어 좀 더 ‘회화적’으로 표상하기를 시도한다. 작가의 그녀는 거칠고, 기괴하며 때로는 우스꽝스럽다. 마치 단역처럼 혹은 누군가의 대역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녀와 그녀가 멈춘 공간의 현실 전체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메시지를 생산하기에 앞서 감정적 동요를 먼저 일으킨다. 사적인 자기감정에 충실한 듯한 그녀는 감정에 도취한 채 거기에 머무르고,
그 상태는 우리로 하여금 이성적 접근을 불허한다. 대신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사적 진실을 추구하며 자신의 진실을 공표한다. 작가의 복합적인 의식에 밀착해 있는 대상들은 파편처럼, 되풀이하며, 등장하여 주관적인 리얼리티를 생성한다. 그 결과 서정배 작가의 작업은 논리적으로 증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감정적 차원의 대상으로 바라볼 때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실제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현실계라 부를 때, 서정배 작가의 주관적인 리얼리티는 사실적이지 않은 세계를 기반으로 한다. 그 세계는 초현실적이거나 전혀 구체적이지 않다. 그저 공허할 뿐이다. 일단 작업 자체의 리얼리티를 살펴보노라면, 작업 내의 공간에는 현실적 상황묘사가 없다. 간혹 일상적 공간으로 이해되는 장면이 조각처럼 등장하지만 이런 작은 설명적 요소는 작품이 쏟아내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녀’는 그녀 자신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과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일상적 요소는 작가에게 ‘그러한’ 감정이 다가왔던 시공간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관해 ‘일상에서의 특별하지 않은, 설명하지 않은 감정들’을 담아내고 있다고 설명한 것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일상이란 작가 자신이 살아가는 그 각각의 순간을 설명하기 위해 차용한 언어였을 뿐이지, 그 시공간과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감정을 추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특별하지 않으며 설명하지 않은 감정이란 감정을 느끼는 주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보편적이거나 절대적인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서정배 작가의 작업이 담아내는 일상에서의 특별하지 않으며 설명하지 않은 감정들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아마도 작가가 ‘불안에 대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고 밝힌 것으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불안한 감정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그러한’ 느낌을 받는 순간 오히려 ‘그러한’ 감정들을 통해 살아있음을 의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일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상실되거나 결핍되는 느낌 혹은 자신의 주체적인 상태가 흔들리는 경험 등이 야기하는 불안을 기록하고 이를 통해 불안한 감정을 느낀 ‘순간’ 즉 ‘지금’ 그러하기에 살아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한다. 결국 작가에게 특별하지 않은 그리고 설명하지 않은 감정은 자신의 불안을 끄집어내는 사소한 사적 감정들로 이는 매우 자연스러우며 즉각적인 것이다. 그리고 불안은 작가의 상상력에 영향을 주고 그 느낌으로부터 작가는 ‘한 존재로서 실존하는 쾌감’을 경험한다. 불안은 이제 작가의 상상력을 완전히 독점하고, 작가는 점차 현실적이지 않은 경험으로부터도 불안을 현실적인 것으로 분명하게 드러낸다. 불안에 대한 집착적인 상상력은 사소한 것들로부터까지 작가를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어두운 불안의 심연 속으로 날마다 빠져들게 만든다. 작가는 반복해서 불안하고 반복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치지 않고 불안을 원한다.
지난 날 서정배 작가는 완성되지 않은 인격체로서의 소녀 ‘키키’를 통해 사회 속 여성의 정체성을 고민했다. 이는 사회와 작가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아가 서로 일치하지 않았던 불완전한 정체성에 대한 사유였다. 그리고 작가는 현재의 ‘그녀’를 통해 절대적 자아를 갈망한다. 작가는 절대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자아로서의 완전체로 가는 여정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의심한고 의식한다. 불완전에 대한 결핍은 불안을 야기하고, 불안은 작가를 현존하게 한다. 작가는 자신의 목적을 의식하는 상상 행위를 다양한 매체로 기록하고, 우리는 기록이 담아낸 혼란스러운 내적 리얼리티를 통해 작가의 반복적인 불안을 필연적으로 맞닥뜨린다. 이때 우리의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작가의 주관적 리얼리티는 아마도 우리로 하여금 내재되어 있던 ‘설명하지 않았던’ 감정을 스스로 들추어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요가 가능해지는 순간에 바로 서정배 작가의 작업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보경/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