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는 2014년 제8기 입주작가들의 릴레이 전시를 개최한다. 전체 입주작가 홍보를 위한 프로모션 전시로서 이전 작가들의 작품발표 워크숍을 실시하고 작품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를 이끌어낸 성과보고전이다.
박해빈의 풍경들은 'Open Water'라는 주제로 수중의 풍경을 재현해낸다. 그녀는 취미인 스쿠버다이버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바다에 대한 신비로운 풍경들을 판타지라는 이미지로 접목해 독특한 미감을 전달한다. 화면은 물감을 얇게 중첩시켜 얻은 마티에르위에 물 속과 경계에 있는 풍경들을 관람자로 하여금 눈으로보는 풍경보다는 심리적 풍경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관찰자의 눈’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말하듯 우리가 아는 모든 세계는 '관찰'하고자 하는 '관-찰-자'의 몫이라는 것을 이 작업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OPEN WATER
물속에서 잠수부가 바라본 풍경, 해저 바닥에 누워 저 멀리 수면 위를 올려본 장면, 어항 밖에서 물속을 들여다 본 정경, 두터운 안개 너머 흐릿하게 드러나는 비행기의 형상, 흩날리는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대기의 두께, 건조한 대기 위로 까슬까슬 피어나는 모래의 질감 …. 박해빈의 근작 회화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시각적 체험이다. 작가는 가시적인 외부세계에 대한 관찰자로서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관찰자가 없으면 물질세계의 어떠한 구분도 존재하지 않으며, 관찰자의 소멸은 세계의 소멸을 의미한다”는 인용구는 시각적 인지 주체로서의 존재를 일깨운다. 대상과 주체, 세계와 자아,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에 입각하여 시각적 체험을 통해 사유하는 주체를 검증하는 것은 서구 근대철학의 대전제였다. 그 출발점은 중세적 가치에서 결별하고 지적 사유의 힘을 존재에 대한 입증으로 밀고 나갔던 근대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오감 중 가장 고귀하고 포괄적인 감각을 ‘시각’이라고 명시했다. 시각은 인간의 삶을 수행하는 가장 고차원적인 감각이며 정신적인 사유를 가능케 하는 가장 우월한 감각이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이런 시각적 인식체계는, 20세기 말 인간의 오만한 자기 확신과 자연을 지배와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서구 문명의 폐해를 낳았다는 비판이 제기된 지도 오래지만, 세상을 보는 방법, 시각적 인식과 그것의 재현에 민감한 시각예술가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주장이다.
흥미롭게도, 빛과 광선, 눈의 작용을 설명하는 논문에서 데카르트는 빛의 속성을 맹인의 지팡이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 지팡이를 툭툭 쳐서 손에 전해지는 감각을 통해 대상을 인지하듯이, 빛은 공기나 투명한 물체를 통과하여 눈에 전해지는 움직임이라고 정의했다. 맹인에게 지팡이를 통해 전해지는 촉각이 비맹인에게는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시각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투명한 공기를 매개로 한 데카르트의 빛이 이성의 광채, 사유의 근거였다면, 박해빈의 독특한 시각적 인식은 데카르트가 공기나 그와 비슷한 투명한 물체라고 지칭했던 것 중에 유동하는 물, 두텁게 안개 낀 대기, 바람 불어 산란하는 구름 등 변조된 투명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단단하고 매끈한 유리나 크리스털을 매개한 시각은 지적 명징함을 선사하지만, 투명하지만 검푸른 깊이를 만들어내는 물의 렌즈, 일렁이며 유동하는 거대한 바닷물, 두텁게 안개 낀 대기는 맑고 투명한 시각적 인식을 마비시키는 대신, 모호하고 어스름한 유기적 감성을 일깨운다. 투명한 대기를 관통한 태양빛이 명료한 지적 사유로 이어진다면, 분명히 존재하지만 순간적으로 깊어지고 일시적으로 멀어지기도 하는 시각적 체험은 지적 사유의 경계를 흐려놓는다.
이러한 시각적 체험을 회화 평면 위에 재현하기 위해 박해빈은 유채물감에 오일을 듬뿍 섞어 사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일반적으로 불투명한 두께로 붓질을 할수록 형태의 경계가 선명해지는 것이 유채물감의 특성이지만, 오일을 듬뿍 섞은 박해빈의 유채물감은 얇게 여러 겹 중첩되지만 물처럼 투명한 감각을 잃지 않고, 여러 층의 물감이 가해질수록 화면 위의 형상은 선명해지기 보다는 깊어지고 멀어지고 흐려진다. 유채물감으로 투명한 물감의 층을 만들고 흐릿하게 번져가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박해빈의 회화는 분명 외부세계를 향한 시각적 인식에서 비롯되지만, 현실과 꿈, 지적인 사유와 몽환적인 환상, 실재와 백일몽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묘한 지점에 위치한다. 균질체의 투명한 대기를 관통하는 빛의 작용이 인간의 사유와 존재를 증명한다면, 투명하지만 검푸르게 깊어지기도 하고 어두운 심연 속으로 모든 것을 묻어버리기도 하는 물의 매개는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 시각과 촉각의 경계를 오가는 박해빈의 시각적 인지를 분명하지만 모호하게 자극한다. 물이 매개하는 세상의 중심에 친숙함과 기이함, 명징함과 모호함, 감각적 체험이면서 정신적 사유에 잇닿아 있는 시각적 인식에 매료되어 있는 박해빈의 눈이 존재한다. 권영진/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