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릴레이 프로젝트 개인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는 18기 입주작가 13명이 입주기간 내에 제작한 창작 성과물을 전시로 선보이는 릴레이 프로젝트를 2024년 8월 1일부터 12월 25일까지 7회차로 나누어 진행한다. 본 전시는 릴레이 개인전 1회차로 임재형 작가의 개인전 《물가에서》이다.
물가에서 Edge of the Water 물가는 물과 땅의 중간지대로, 땅에 속한 채 물을 향하는 자리다. 나는 물의 곁을 떠나지 않지만 더 깊이 뛰어들지도 않은—어쩌면 못한—채 로, 물 안팎의 사건이 남긴 공백의 윤곽을 어림해 본다. 10년 전 바다 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었고, 나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때로 어떤 질문 은 답을 찾기보다 그저 오래도록—어쩌면 평생을—함께하기 위해 존 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은 그 자체로 어떤 모양을 갖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둘러싼 땅이나 사물에 의해, 혹은 보는 이의 위치에 의해 일시적인 모습과 윤곽을 가 질 뿐이다. 사물과 장면의 의미 또한 마찬가지다. 그 자체보다 그것을 보는 개인의 경험과 관점에 의해 좌우되며, 그가 변화하면 의미 또한 변화한다. 우리는 이처럼 개인화된 의미의 조각들을 엮어가며 세계관 을 갱신한다. 전시는 물가의 장면들이 이루는 맥락을 통해 상실 이후 의 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드러낸다. 나는 사라진 대상을 직접 그리기보다 빈자리의 주변을 맴돌며 비유적 인 소재나 그리기의 방식을 찾는다. 물의 윤곽을 파악하기 위해 물가 를 따라 걷는 사람처럼. ‘에둘러 그리기’라 할만한 작업의 형식은 사 라진 것에 대한 심리적 거리의 발로이자, 알 수 없는 것을 작업으로 다루기 위한 윤리적 선택의 결과이다. 어떻게 하면 채울 수 없는 공백 을 외면하거나 재단하지 않으면서 보다 사려 깊고 충분하게 다룰 수 있을까. 오래도록 함께해야 할 질문이다.
- 작품소개
몽타주
무관한 경험을 연관 지으며 의미의 체계를 만들어가는 개인의 관점에 대한 그림이다. 영상매체의 몽타주가 서로 다른 장면을 순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면, 삼각형 구조 위의 그림들은 특정한 순서를 형성하지 않는다. 예각을 이뤄 둘러선 탓에 관객은 한 번에 하나의 그림만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별개의 장면이 모여 의미를 촉발하는 곳은 작품을 돌아본 관객의 머릿속이 된다.
경우
격자형 창문의 이미지에서 비롯한 판화 연작이다. 줄지어 깨진 창의 모습은 작은 무질서가 더 큰 범죄를 야기할 수 있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을 떠올리게 하거나, 창문으로 비유되곤 하는 이미지에 대한 무력감의 반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나는 깨지거나 깨지지 않은 창을 보며, 서로 다른 비극 속에서 상반된 의미를 지니게 된 두 유리창을 떠올린다. 하나는 무너진 쌍둥이빌딩에서 유일하게 깨지지 않고 발견된 83층의 창문이고, 다른 하나는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끝내 깨지지 않은 세월호 4층 우현의 창문이다.
연못
겨울 연못을 그린다. 지난 해의 연꽃은 목만 남긴 채 사라졌다. 땅속에는 다음 세대의 꽃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가지 사이로 물은 쉼없이 흐르는 하늘의 색을 비춘다. 요컨대 연못은 일년과 하루라는, 식물과 하늘의 생애주기를 동시에 품고 있는 셈이다. 짧은 주기로 생몰을 반복하는 이들의 모습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인간의 삶 또한 거대한 순환 속에서 피고 지는 일시적인 것임을 깨닫게 한다. 나는 읽을 수 없는 글을 필사하듯 잘린 가지의 모양을 옮긴다. 글자 사이의 공백을 헤아리듯 수면의 색을 채운다. 의미를 찾는 인간에게 묵묵부답의 세계는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더듬어 찾으려 한다.
얕은 빛
스스로 빛을 만들어낸 날 인간은 밤을 정복했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세계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바다의 어둠 앞에서 인간의 빛은 얼마나 미약한가. 누군가는 얕은 빛에 분노했고, 누군가는 그 빛에라도 의지해 찾으려 했다. 밤의 윤슬은 수면을 넘어서지 못한 채 되비친 빛의 파편이므로, 반짝이는 물결만큼 바닷속은 어두웠을 것이다. 처참한 최선과 아득한 충분 사이에서 빛은 끊임없이 내렸다.
찾는 사람
그는 물에 발을 담근 채 물 속의 무언가를 찾고있다. 찾으려는 움직임은 파문을 만들고, 파문은 다시 찾는 일을 어렵게 한다. 순간에도 지문이 있다면 그것은 파문과 같은 것이리라. 지문처럼 요철로만 존재하는 파문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 사람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십년 전 바다에서 잃어버린 것에 관한, 혹은 남겨진 우리에 관한 비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평형/어떤 시계
판을 거쳐 종이에 도달하는 판화의 속성을 활용한 작품이다. 기울어진 시계를 판에 그린 뒤 똑바로 보이도록 되돌려 찍거나, 종이를 점차 기울여가며 바다의 모습을 찍은 뒤 수평선이 이어지게 되돌려 설치했다. 작품 속 이미지는 똑바로 보이지만 점차 기울어지는 종이의 테두리(평형), 비스듬한 판자국과 중력을 거스른 물감 자국(어떤 시계)은 그것이 한때 기울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못한다. 작품의 형식은 되돌리려는 의지와 그것의 불가능성, 혹은 불가능에도 끝없이 작동하는 의지를 암시한다.
나날
〈나날〉에는 모종의 반복이 있다. 중간의 세 마디에 bis(두 번 연주하기) 기호가 붙은 5마디 악보의 진행처럼, 첫 장과 마지막 장 사이에서 세 장의 그림이 반복된다. 삶의 첫날과 마지막 날은 두 번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무수히 돌아오는 낮과 밤, 그리고 계절이 있다. ‘나날’은 두 개의 ‘날’을 이어 만든 말이지만, 실상 ‘반복되는 모든 날’을 뜻한다. 그 모든 날은 서로 다른 날이기도 하다. 그림 속 흑과 백, 있는 것과 없는 것, 가지와 가지 아닌 것, 물과 물 아닌 것은 같은 테두리를 공유하며 맞닿은 채 서로의 모양을 규정한다.
세대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과 내게 조금은 다를 바다의 의미를 짐작해 본다. 아이들이 내가 그린 바다 앞에 서 있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들의 얼굴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조악한 화질의 사진을 큰 화면 위에 작은 연필로 그리려 하면, 그제야 이미지의 어떤 곳도 분명치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처럼 변모한 순간의 조각을 붙들고 씨름하는 오랜 시간은 그 자체로 그림의 주요한 형식이 된다.
임재형은 개인적/사회적 상실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며 '사라짐'과 '그리기'의 문제를 연관 지어 탐구하고 있다. 그는 남겨진 것 앞에서 부재한 것을 짐작해봄으로써 '사라짐'을 인식하는데, 이는 분명한 자국을 남기면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모호함을 쫒는 '그리기'의 과정과 다른 듯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