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릴레이 프로젝트 개인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는 18기 입주작가 13명이 입주기간 내에 제작한 창작 성과물을 전시로 선보이는 릴레이 프로젝트를 2024년 8월 1일부터 12월 25일까지 7회차로 나누어 진행한다. 본 전시는 릴레이 개인전 3회차로 김용선 작가의 개인전 《그는 거기에 없었다.》이다.
#탄생
2020년 10월부터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임의 번호로 부여되지만, 그 이전엔 성별로 구분되는 한 자리 숫자와 네 자리 의 지역번호, 출생신고 등록 순서에 따른 숫자 한자리, 앞의 열두 자리를 조합하여 산출되는 마지막 검증 번호 한자리까 지 총 일곱 자리 번호로 구성되었다. 한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한 가족 같은 경우엔 가족끼리 또는 친구끼리 뒷자리가 비 슷한 경우는 봤지만 내 경우엔 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아버지의 생년월일과 같다.
이 우연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시 한번 카메라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버지는 내게 늘 카메라를 사주고 싶 어 했다. 미안하다고도 했다. 그건 아버지의 술주정 레파토리 중 하나였다. 나는 순전히 아버지의 푸념이 듣기 싫어 아버 지에게 삼십만 원을 받아내었다. 어쨌든 단돈 삼십만 원으로 아버지는 응어리를 풀고 나는 더 이상 푸념을 듣지 않아도 되 니 서로에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 카메라를 사용한 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어차피 그 카 메라는 아버지의 푸념을 막는 것만으로도 용도를 다했으니 그걸로 촬영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며 그 간 하지 않은 일과 버리지 못한 물건들에 대해 생각했다.
도무지 아버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머니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어머니가 내놓은 대답은 생 각보다 명쾌했다.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는 아버지가 부모와 형제로부터 엄하게만 키워져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고 했 다. 그래도 둘째인 너는 아주 아꼈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과거에 함몰되지 않고 지난 일 을 생각하는데 오늘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야 아버지의 아버지부터 내려오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 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버지가 하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란 그늘은 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에 자리 잡은 아버지의 생년월일처럼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언젠가 아버지는 내게 자신이 챙겨놓은 옛날 앨범을 가져가라고 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한테 왜 그랬었냐고 물었을 때였나. 아니면 집으 로 돌아가는 자신의 뒷모습을 지켜보라고 했던 날이었나. 아버지는 옛날 가족 앨범 속 각각의 순간마다 글을 좀 남겨놓았 다. 나는 그게 아버지의 유언이라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용선 탄생.’
#비탄생
저는 그 존재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부터 내 삶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단 생각 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나의 탄생이 있기까지 몇 번의 실패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실패라는 건 순전히 '우리'의 관점입니다. 형제라고 하기엔 그건 순전히 제 관점이고 그 존재가 저보다 먼저 세상에 나왔다면 저는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렇다고 '그'라고 딱 잘라 부르기엔 어머니의 선택이 언제쯤이었는지, 그리고 어머니의 선택이 아니더라도 그 존재가 언제 어떻게 됐을지도 확신할 순 없는 일이니까요.
'이제 네 새끼를 낳나 봐라.' 날아오는 아버지의 주먹에 대한 어머니의 대답이었습니다. 형을 낳고 애가 들어선 적이 몇 번 있었으나 입덧이 심했던 탓에 금세 알아채고 모두 아이를 거부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생긴 것입니다. 어머니가 저 를 가지셨을 땐 그렇게 심했던 입덧도 일절 하지 않았기에 단순히 생리 주기가 틀어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혹시 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형을 비롯하여 그 이전까진 입덧이 무지 심 했으니 딸이면 달라도 뭔가 다를 거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낳기로 결심했습니다. 딸이 생긴다면 집안 분위기도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역시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존재를 막연하게 '우리'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 역시 순전히 제 관점일지 모르겠습니다. 그 존재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고 저는 세상에 나왔으니 '우리'라고 묶기엔 무리가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저는 그 존 재와 감정적으로 유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유독 입덧이 심해서 임신 사실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던 어머니가 저를 가 지셨을 때 입덧하지 않고 임신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건 사실 어머니에게 먼저 자리 잡았던 그 존재들이 알 려준 생존 방식 같은 건 아니었을까요. 그렇기에 가족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는 건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됩니 다. 제가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저 나의 시간을 그가 존재했을지 모르는 그 시간 사이에 포개어 놓는 것뿐입니다. 이건 부모에 대한 우리의 대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