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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Lee Jung Hee : 날 선 귀Sharp Edged Ear Sharp Edged 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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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명
  • 전시기간 2012-12-13 ~ 2012-12-23
  • 전시장소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전시개요

보이는 끈, 보이지 않는 끈

1.
익숙한, 혹은 낯선 무언가가 무 토막처럼 송송 잘려 널브러져 있다. 일부는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다. 날카로운 무엇에 의해 깔끔하게 도려내어져 있다. 구천을 떠도는 유령과도 같은 퀭한 표정의 수많은 얼굴들이 슬프게 울부짖는다. 제법 섬뜩하다. 게다가 셀 수 없이 많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느다란 선들이 신체 이곳저곳으로부터 자라나듯, 도망치듯 밀고나오고 있다. 잘게 잘려진, 단면을 드러낸 그것은 생명체, 혹은 동식물의 유기구조를 구성하는 신경정신계감관, 때론 신체일부처럼 보인다. 정교하게 수없이 반복되어 잘린 덩어리만큼이나 더욱 잘고 짧게 구사된 선들이 흩어져 있기도 하고 특정 지점에 선들이 두텁게 중첩되거나 뭉쳐 있는 간단한 듯 실로 복잡한 드로잉이다. 화면 속 그것들은 스스로의 몸뚱이에, 또는 다른 그것과 여기저기서 얽히고설키며 시선을 어지럽힌다. 그들은 사람의 신체, 특히 몸에 난 이런저런 구멍으로부터 솟아 나와 다른 누군가의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나마 선이 그것의 색과 함께 일정한 방향성을 보이고 있어 나름의 통일감을 읽을 수 있을 정도다. 어지럽다.

이정희가 주로 다루는 것은 사람이다. 그의 사람은 온전한 모습의 사람이라기보다는 부분적으로 절단되었거나 신체의 일부가 거세된 상태로 드러난다. 불안한 느낌을 주거나 불완전한 형태로 분절되어 화면에 가시화된다. 이정희가 사람을 이러한 방식으로 탐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제시하는 인체는 신체적, 심리적 특성이나 지향이 혼합된 하나의 회화적 구조체로 이른바 인간 본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정희는 인간을 통합성을 지닌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성격은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보인다. 누구나 습관화된 행동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으로 인해 상대방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나 타인으로부터 각각이 지닌 성격의 본체, 본성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행동에서 그 사람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따름이다.

이정희의 작업은 이러한 인간 본성의 재구조화, 재조립 과정이다. 아마도 미루어 짐작컨대 세파에 찌든 인간의 다중적 욕망과 그 기능을 집중 탐구하며 자신이 이해한 사람의 성격, 본성을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과 복잡한 내면을 까발리는 해부과정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거죽, 외형상을 탐닉하기 보다는 사람이 보여주는 일관성 너머의 무언가를 추측한다. 인간본성의 해부, 즉 인간이 지닌 인성(人性)과 수성(獸性)을 들춰내는 작업이다. 최근 이정희의 이러한 탐색은 추측을 넘어 성격과 인간관계의 연구차원으로 나아간다. 인간을 하나의 사회적 구조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정희는 건조한 세상사속 인간관계사를 독특한 방식으로 도해한다. 인간의 본성을 드라마틱하게 잔혹하게 드러낸다. 잔혹극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일방적인, 피해자가 곧 가해자가 되는, 드러나지 않는 폭력의 속성을 까발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정희의 그림을 볼 때면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의 그림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가적인 감정, 즉 인성과 수성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몸 어딘가에 안전하게 또는 위험스럽게 잠복되어 있는 수성을 까발리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자칫 생활 가운데 크고 작은 기운으로 드러날 수도 있는, 또는 부지불식간에 드러나고 있는 인간의 또다른 진성(眞性)을 강조하고 있어 보인다. 짐짓 은폐/엄폐된 듯 억눌려 있는, 불편한 진실인 그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2.
이정희의 작업은 동네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길 잃은 강아지와의 동거와 생활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은 한 식구로 지내면서 서로 의지를 넘어 정서적 교감을 나누게 된다. 이정희는 이 과정에서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독특한 교감과 일부 동병상련의 기운을 경험한다. "타인과의 정신적 교류를 꿈꾸던 나에게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고 이를 작업의 소재로 다루기 시작하였다."(작가노트)는 말처럼 '만남', '교감', '소통'이라는 독특한 경험은 이정희 작업에 있어 보이지 않는 키워드가 되었다. 유기견과의 우연한 만남. 어쩌면 자신에게도 잠복되어 있을 수 있는, 스스로도 그리할 수 있는 유기본성이 은폐되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방기한 현실, 무책임성, 그것의 가공할 두려움과 무서움이 떠올랐다. 그냥 지나칠 경우, 자신도 어쩌면 공범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정희는 녀석을 집으로 데려 왔다. 잔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한 경험과 생각을 그림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버려지는 현실, 버림을 당한 녀석의 심정, 버린 사람의 마음, 누군가로부터 무엇으로부터 버려질 수 있다는 본성과 개연성을 스스로 고백이라도 하듯 강아지를 지켜보며 무심코 시작한 것이다.  

그의 드로잉은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에게 잠복된 수성과 인성, 그것의 발화, 발현, 외화에 다름 아니다. 그의 이미지는 마치 자기 신체를 잘라내고 절단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까발리려는 듯한 공격적인 해체행위다. 또한 인간의 파편화된 감성과 이성을 복원하되, 그것을 서로 다른 생명체와 사람들, 그들과의 이질적 접합으로 풀어보려는 이종교배이기도 하다. 혹은 각박한 삶 속에서 잃어버린, 잊어버린 그 무엇을 최초의 감정과 위치로 복원시키려는 재접합, 수선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가족으로 새롭게 하나된 유기견의 사례를 통해 가족, 또는 사회, 울타리라고 하는 것의 본디 순기능과 역할, 필요성, 역기능 등을 반추하며 그것들의 본래적 기능을 회복시키려는, 되찾아나가는 자기수행의 과정, 혹은 주장에 다름없어 보인다.  

이정희의 작업은 한편 인간이 만든, 인간이 함께 하는 울타리, 시스템이, 혹은 관계가 한 없이 잔인할 수 있음을 경고하듯 드러내고 있다. 그리하여 작가는 어쩌면 자신을 절대고독, 인내와 표현의 한계상황, 극한까지 밀고 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울타리라는 말은 예측 가능한 외부의 무언가로부터 내부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마련한 것을 말한다. 틀, 시스템이라는 말도 또 그러한 기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합의에 의해 진행되기도 하고 개인적인 방어를 위해 개인적 판단에 의해 설치, 마련되는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일정한, 건강한 울타리는 내부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지만 울타리는 하나의 집단으로 힘을 행사하기도 한다. 또한 울타리 넘어 외계, 다른 울타리, 집단에 대해서는 하나의 긴장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서로가 그러하다. 경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몇몇 울타리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합치기도 하고 통합, 폐합되어 다른 그것에 대항하기도 한다. 힘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좋은 울타리는 좋은 이웃사람을 만드는 법'이다. 사회나 개인은 이러한 힘의 각축장 속에서 살아간다. 각각 셈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공동의 전선을 형성하거나 개인/집단의 목적을 위해 진정성 없는 통합을 하기도 한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 한데 어울리는 것이다. 갈등의 불씨를 안고 집단/짚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익을 위해 서로 물고 물리는 말도 안되는 합의, 그로 인해 파생되는 부작용을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접한다. 

혹자는 내부의 긴장상태를 무화하기 위해 타 집단과의 갈등 관계를 일부러 조장하기도 한다. 싸움, 전쟁, 또는 왜곡된 스포츠 정책 등이 그것이다.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면 집단 내부의 갈등은 다소간 잠잠해지는 법이다. 이러한 크고 작은 개인적/사회적 방어기제가 출몰하면서 사회는 또다시 파편화되고 고립된다. 개인과 집단의 이익이 다시 충돌하며 대립한다. 사회가, 인간관계가 건조하고 푸석푸석해지는 원인이 된다. 이정희는 이러한 일들을 매일처럼 접하면서 그 원인을 갈무리하여 한계를 수습하고 마무리하려하지만, 그림에서, 일상에서 또다른 한계에 직면한다. 일방적인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폭력일 수 있다. 이정희는 울타리라는 개념의 왜곡된 권력화, 관계의 정치화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를 더하기 시작했다.  

3.
예술은 구석에서 비롯된다. 마음의 어두운 곳, 생활 구석에서 시작되어 환히 그곳을 밝힌다. 예술의 원동력은 적당한 고독이다. 이정희의 그림은 또한 외로움을 덜어내거나 나누고자 하는, 소통을 넘어 정신적 교감을 나누고자하는 바람도 담고 있다. 이러한 바람은 주로 붓이 아닌 펜과 색연필을 사용한 선묘를 중심으로 시작된다. 단단하고 유연한 금속 볼(ball)과 부드러우면서도 제법 날카로운 연필심(鉛筆心)을 빠르게 혹은 느릿하게 운용하며 화면 깊숙이 다양한 감정의 골을 새긴다. 얇고 날카로운 선을 새기듯, 고백하듯 하나하나 더해 나간다. 겹쳐진 선들은 군데군데 뭉쳐지기도 하고 하나의 커다란 움직임으로 나란히 흐르기도 한다. 새하얀 종이위에 셀 수 없이 많은 필선들이 교차하듯 반복되면서 이정희의 호흡은 구체적인 형상(figure)과 배경(ground)으로 밀고 올라온다. 그의 그림이 드로잉적인 특징을 강하게 보이는 이유다.

물 그림도, 기름 그림도 아니지만 그의 화면은 건조하지 않다. 힘 있게 더해진 연필가루와 유성펜의 더해짐은 보는 위치에 따라 빛을 발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촉촉한 기운을 보인다. 붓으로 그리지 않기에 그의 화면은 단번에 표정으로 화답하지 않는다. 일견 신경질적인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생각이상의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그의 화면은 두터운 외형적 질감이나 그 흔한 행위의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색이 면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기다랗고 날카로운 선들이 화면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상처를 내지만, 일정시간 어느 한 부분에 집중되는 작가의 지난한 행위를, 자신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수많은 필선과 작가의 그리는 행위를 받아들인다. 

이정희의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연결 고리, 끈 등으로 얽혀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관계의 보이는 끈,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그것들은 개체와 개체 사이의 사랑의 유기적 연결, 계획된 유대를 시도, 강조한다. 크게 보아 삶의 건조함, 관계의 푸석함을 극복하고 그것들의 건강한 회복을 위해 기능한다. 단단하고 견고한 끈, 끈끈하게 살가운 끈, 정겹고 질긴 끈으로 이어진다. 무언가를 지탱하고 연결하고 맺어주는 끈. 다만 그것 하나하나는 얇고 기다랗고 연약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면 제법 단단한 물리적 힘과 질긴 인연의 끈으로 기능한다. 하나하나는 무시하기 쉬운 하찮은 존재일 수 있다. 이정희의 가느다란 선들은 사소하고 하찮은, 세상의 관심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들을 박애적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이정희 화면에 등장하는 이러한 선, 끈은 인간은 고립되어 떨어져서 살 수 없음을, 삶에 있어 사회적, 인간적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사이에서의 예술의 역할을 돌아보게 한다. 

작가와 강아지는 모두 가정, 가족이라는 울타리, 이른바 일종의 보호시스템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였다. 개인의 자발적의지에 의한 작가의 선택과 누군가로부터 버려진, 버림받은 강아지의 그것은 자신의 처지와는 다른 듯 비슷한 기운이었다. 어쨌든 그것은 끊어진, 익숙하던 가족공동체로부터 이탈되어 있는 절대적 고독, 혹은 상대적 독립의 상태였다. 자발적, 혹은 타율에 의해 또다른 시스템, 공동체 속으로 던져진 상태다. 이러한 고립정황은 또다른 시스템 속에서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발견하는 기회로 작용하며, 이른바 사회화과정을 거칠 것이다.  

이정희는 이와 같이 불완전한 삶을 사는 두 개체를 표현하기 위해 절단된 신체의 모습과 도형을 결합한 중성적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수없이 등장하는 가늘고 긴 선은 개체 사이의 정신적인 결합의 중요성과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신체의 물리적 분절과 선을 통한 정신적 교통을 통해 강조된다. 작가의 바람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작가는 소통이 단절된 현실, 불통의 현재를 살아가는 답답함과 소통에의 바람을 에둘러 우회하고 있다.  

이정희의 작업은 사회화과정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나 아닌 사람과 제도와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이런저런 불통(不通)의 경험과 소외의 감정을 고백, 위로, 치료하는 자기치유 방식이기도 하다. 사람이 희망임을, 소통이 중요하고도 필요함을 나름의 방식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주어진 생을 아름답게 살아가려는 작가 스스로의 바람을 담고 있다. 붓이 아닌 필선 위주로 이루어진 이정희의 개성 넘치는 희망세상은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진정으로 소통하며 하나가 되고 싶은 강렬한 결합에의 욕구를 표현한 것이다. 세상사에 시달리고 충분히 지쳤지만, 세상과 다투지 않고 어울리며 마음을 나누고픈 강렬한 열린 의지와 바람을 담았다. "선(들)은 생각이 지나는 통로여서 둘을 정신적으로 결합시켜주기도 하고, 혈액이 흘러가는 혈관이어서 신체적으로 이어주기도 한다."(작가노트) 우연하고도 낯선 만남이 정신은 물론 신체적 교감, 소통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확장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4.
이정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각자의 격(格)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세상을 살아나감에 있어 중요한 것은 결국 나와 나 아닌 모두를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수많은 인간적 노력과 유기적 관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로가 마음을 열고 상호 존중하며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지적하기보다는 인정하고 자기희생할 수 있는 넉넉함이 있다면 낯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음을 모두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계할 것은 작업이 스스로의 생각 울타리 안에서만 지나치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는 행위가 지나친 자기방어 기제가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 하지 않던가. 세상에 대한 자기 언설의 적절한 회화적 공격이 필요하다.

이정희는 피하고 싶을 정도로 인간 본성을 노골화, 파편화하고 있고 그것을 불완전한 존재와 신체의 낯선 조합으로 까발리듯 연출하고 있다. 그의 불가해한 화면만큼이나 세상사가 녹록치 않음을, 인간사의 건조함과 불완전함의 깊은 골이 존재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관계성이 상실된, 스스로 상실한 억지 인연으로서의 계획된 끈이 아닌, 자연스런 정서적 교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역설한다.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정희의 작업은, 작금의 열린 세상에서, 새삼 '끈'이라는 단어의 사회적 의미와 노력, 역할을 돌아보게 한다.  박천남/ 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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