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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NGJU MUSEUM OF ART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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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유미 모또지마 Mayoumi Motojima : 침묵 속에서 바라보다. Look at in si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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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명
  • 전시기간 2013-11-21 ~ 2013-12-01
  • 전시장소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전시개요

2013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작가들의 성과물을 보여주는 전시를 개최한다. 이번 릴레이 전시 프로젝트 참여작가로 마유미 모토지마의 근작들이 전시된다. 이번 그녀의 작업들은 신체를 모티브로 조각, 회화, 드로잉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해석한다. 그녀의 작업들은 공포, 불안, 감정의 소멸하는 것 등 인간의 심리에 관한 이야기를 그녀가 만든 '소녀'의 상에 대입한다. 연약한 신체성을 가진 파라핀 조각과 오일파스텔, 연필 드로잉들은 그녀가 경험한 낯선 이타의 세계들을 보여주며 관람객을 여림의 세계로 인도한다.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표현 불가능한 감정의 표현


한눈에 쏙 들어올 정도의 아담한 스케일을 가지는 모또지마 마유미의 작품들은 드로잉을 출발점으로 한다. 입체작품은 종이위에 펜으로 그려진 작품에서 뛰쳐나온 듯하다. 그것은 작가가 처음에 회화를 전공했기 때문이라 추측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일본과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발표된 작품 경향을 보면, 있는 듯 없는 듯한 유령 같은 존재들과 어울리는 양식이다. 시작은 있지만 끝은 불확실한 드로잉의 방식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거창한 완결을 향해서 잔뜩 힘이 들어간 큰 규모의 회화나 조각, 설치, 영상들이 펼치는 스펙터클이 아니라, 삶의 구석구석에 보일 듯 말 듯 포진해 있다. 작가는 색을 빼는 것을 비롯해서 단순한 형태와 작은 크기를 일관되게 견지한다. 이러한 삭감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존재감을 가진다. 때로 인형이나 가면의 형태가 연상되는 그것들은 물신적이면서도 주술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스튜디오 안에는 작은 인체들이 여기저기에 자리한다. 양초를 녹여 만든 재료로 만들어진 허연 인체들은 작업실 뿐 아니라, 전시장에서도 벽면이나 바닥면에 기대어 있다. 드로잉은 회화보다 자신의 생각을 직접 표현할 수 있는 매체이며, 그것이 3차원 상에 구현되었을 때도 규모나 형태면에서 초심을 잃지 않는다. 드로잉과 조각에는 어떤 은유적 상황 속에 있는 인간이 등장한다. 자신의 머리를 밟고 있기에 나아갈 수 없는 상태, 앞으로 휘어진 다리, 등에 뚫린 큰 구멍, 잘린 끈, 또는 칼로 잘라지지 않는 물 같은 이미지는 박탈감과 폭력성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외부를 향한 것이 아니다. ‘내부를 향한 사디즘인 매저키즘’(프로이트)에 가깝다. 이 매저키즘적 환상에는 정적 속의 긴장감이 내재해 있다. 몸의 일부분만 있어서 해부학적 형태가 불분명한 인간들은, 아직도 여린 소녀 같은 분위기를 가진 작가와 닮았다. 그러나 작품 속의 인물이 특정 개인은 아니다.

그(녀) 또는 그것은 보편화된 소녀 일반이다. 무색무취의 개성을 가지는 이 존재들은 작고 부드러워도 소녀 취향은 아니다. 종이 위에 펜으로 그려진 끊어질 듯 가느다란 선, 양초(왁스)의 따뜻하고 민감한 표면을 가진 입체는 감수성 예민한 소녀를 연상시키지만, 개별적 특성을 나타내는 기호는 삭제된 추상적 소녀일 뿐이다. 과감한 삭감은 단순화이기 보다는 내포적 다양성을 가진다. 작품 속 익명의 보편적 소녀는 예민하지만 무기력하다. 행동하기보다 받아들이며, 말하기보다는 침묵 속에서 바라볼 뿐이다. 입체작품은 가장 적극적인 포즈를 취한 것이 양팔을 벌린 작품인데, 그것조차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보인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수 있는 능력은 예술가의 중요한 역량이기도 하다. 그러나 압축적 언어를 구사하는 예술은 받아들임/ 내보냄의 과정이 비례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마유미의 작품에서 내보냄은 받아들임만큼이나 수동태이다.

드로잉이든 입체든 모든 작품의 제목은 [무제]로 일관한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 이야기를 전달하기 보다는 관객들로 하여금 2차원, 또는 3차원의 작품 표면 위에 무엇인가를 적어 넣기를 원하는 빈 여백이다. 읽는 것을 넘어서 쓰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이다. 표정 없이 전면을 응시하는 민감한 선과 덩어리들은 표현 불가능한 감정을 표현한다. 얼굴이 있다면 표정이 없고, 입체작품의 경우에는 얼굴은 생략된다. 몸이 얼굴을 먹어버린 듯, 몸 전체로 표정 짓는다. 누드나 토르소도 몸을 통해 무언가를 보여지만, 마유미의 작품은 전체, 또는 전체와 유기적 관계를 가지는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절단된 신체라기보다는 그자체가 전체인 단편이다. 단편은 파편과 달리, 부분이지만 전체를 함축한다. 몸은 안과 밖을 구별 짓는 가장 민감한 외관이기에 훼손, 또는 생략에 대한 지각도 뚜렷하다. 입체작품에서 신체의 단편이 등장하는 원인 중의 하나는, 드로잉의 프레임에 의해 잘린 부분이 입체로 연동되어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몸은 일부로 나타나며, 일부일 때조차 아이 발과 어른다리가 결합되는 등, 해부학적 비례 관계가 불확실하다. 이 신체의 단편들은 산문보다는 시에 가깝게 한다. 그것은 산문처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시처럼 응축적으로 말한다. 신체의 부분들은 일상의 동작들을 취하고 있지만, 쭈그리고 있거나 기대어 앉는 등 대부분 수동적인 자세들이다. 그들은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얼굴과 표정은 없지만 앞을 향한 그것들은 그저 조용히 세계를 본다. 그것은 시선이 없는 바라봄이다. 권력과 연관되곤 하는 시선은 무장해제 된다. 팔 또는 다리가 생략된 그것들은 세계와 대면해 있지만 세계와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 같은 인간을 인간이게 한 영웅적 특징보다는 일상 한 귀퉁이를 지키는 사물을 닮았다. 그러나 어디에 쓰이는지 불확실한 이 사물은 19세기 리얼리즘 시대의 사물처럼 그것을 소유한 인간을 반향하지 않는다.

작가는 책상 위나 선반에 놓여있는 입체작품들을 꺼내서 보여주는데, 그것은 전시를 위한 대기 모드가 아니라, 그 구석진 자리가 원래 자기 자리인 것처럼 보인다. 인간과 사물 중간쯤에 있는 마유미의 작품은 양초(왁스)라는 재료를 통해 절적한 표현을 얻었다. 처음에는 하얀 점토를 썼지만, 2007년경부터 양초를 깍아 녹인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냄비 같은 기구에 양초를 녹이는 모습은 마치 요리를 하는 것 같다. 반투명한 양초에 하얀 크레용을 섞어서 만든 재료는 흙이나 플라스틱과도 다른 느낌이다. 연소가 잘되는 유기화합물인 양초는 자신을 녹여가며 빛과 열기를 내품는 본래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때에도 따뜻한 느낌을 준다. 인간 자체가 양초처럼 연소되는 존재이기에, 재료와 형상은 절묘하게 만난다. 초기에는 피부 톤으로 색을 넣기도 했지만, 흰색으로 귀결되었다. 반투명한 흰색이 백옥 피부의 미녀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몸 전체나 얼굴 없는 대상에 색이 있는 것은 어쩐지 안 어울린다.

마유미의 작품은 밀납 인형 박물관 같은 사실주의에 충실한 것이 아니기에, 색을 동원한 모방은 불필요하다. 작은 스케일과 결합하여 그것은 실제의 세상과는 다른 또 다른 세상의 사물이다. 그것은 허구를 통해 현실에 개입하는 예술의 방식이다. 대부분 하얀색이며 절단면이 있는 인체는 화이트 큐브의 수직, 수평의 면과 자연스럽게 접속된다. 작품이 설치된 장면들을 보면 신체의 일부들은 벽이나 바닥에서 자라나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규모가 작기에 신체 절단이라는 잔혹하거나 엽기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지 않는다. 마유미의 작품은 부분들이 어우러져 어떤 유기적 전체를 형성하지는 않으며, 각각 그 자리에 아무런 상호작용 없이 붙박혀 있다. 유기적인 재료와 유기체적인 형태에도 불구하고 동물보다는 광물이나 식물, 사물을 닮았다. 세계의 단편을 수집해 놓은 사진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듯이, 부분들을 연결하는 것은 관객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

각각의 몸은 하나의 어절(語節)이 되어 욕망에 따라 접 붙으면서 의미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함축적이긴 하지만 완전한 신체가 아니기에,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 잘려져 나간 빈 곳이 더 많고 여기에서 새롭게 채워질 또 다른 이야기들이 번성한다. 얼굴만 있는 작품들은 마치 마스크처럼 보인다. 둥근 머리 형태에 납작한 코는 애기 얼굴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드로잉 작품처럼 특정한 연령과 성을 지시하지 않는다. 얼굴의 면으로 가정된 표면들은 접시처럼 납작하다. 가면이 생각나지만, 가면에 내재된 타자로의 변신이나 그것이 야기하는 축제적 열기와는 거리가 먼 서늘함이 있다. 깊이나 실체감이 없는 냉랭한 얼굴들은 배후에 비밀을 감추고 있거나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얼굴이 없는 마유미의 작품은 어떤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하얀 종이 같은 중성적 속성을 지닌다.

마유미는 표현을 삭제함으로서 또 다른 표현을 획득한다. 벽에 나란히 걸리거나 좌대 위에 하나씩 안치한 검은 두상 역시 제각각 혼자인 채 침묵을 지키며 세상이나 밤하늘을 바라본다. 하얀 얼굴이 달처럼 반사한다면 검은 얼굴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삼킨다. 느낌은 다르지만 침묵이라는 점은 공통된다. 마치 잡냄새를 제거하는 향초처럼, 범람하는 정보화시대의 전 방위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수다들에 무위의 침묵으로 대응한다. 마유미의 작품에는 인간이 일관되게 등장하지만, 그 인간은 지상 위에 우뚝 선 기념비적인 존재로서의 위상을 갖지 않는다. 단편이고 얼굴이 없으며, 말하지 않는 이 유령 같은 존재들은 자기 색깔이 없다. 근대에 고양된 주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았던 휴머니즘의 전통이 진보만큼이나 그만큼의 부작용을 낳았기에, 그녀의 작품은 공감을 얻는다. 그것은 과도하게 의미 부여된 인간이라는 중심을 해체하려는 현대문화의 흐름과 조응한다.   이선영/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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