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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련 Jeong Hae Ryun : 텅. 빈. 말 Empty Speech Empty Spe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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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명
  • 전시기간 2013-12-05 ~ 2013-12-15
  • 전시장소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전시개요

들어맞지 않는, 그리고 어떤 창조적 여지

 전시 공간 중앙에는 관람자를 향해 일제히 등을 보인 채 원형의 구조로 서있는 8개의 표지판이 있다. 원 밖에 서면 표지판의 내용이 궁금해져 원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어딘가 모르게 권위적으로 느껴지는 표지판의 위엄 앞에서 주춤하게 된다. 불편한 감정을 뒤로하고 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지만 뾰족한 표지판의 모서리들이 일제히 중앙을 향해 있어서, 혹은 밝게 내리쬐는 조명이 부담스러워서 곧 다시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만다. 텅 비어있지만, 그 안에 머물기 힘들게 하는 어떤 난감함은 관람자로 하여금 원의 안과 밖을 이리저리 거닐게 한다. 그리고 이내 표지판에 투명하게 새겨진 텍스트들을 발견하게 된다. 미묘하게 패배감이 깃든 텍스트이다.  또 다른 공간에는 금속 손잡이가 기이한 형태로 구부러져 벽에 붙어있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거나 잡기가 불편한 위치이다. 억지로 잡아본다고 해도 촉감은 차갑고 낯설다. 작품은 전시 공간 밖으로도 이어지는데 통로와 천장, 계단에 어색한 모습으로 설치된 표지판과 그 안에 새겨진 추상적인 기호가 그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익숙하면서도 이상한 오브제, 기이한 기호, 텍스트와 함께 장소 밖 낯선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들은 들여다보아도 선명히 보이지 않고, 머물려 하면 밀어내며,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과의 조우는 어떤 여지를 이끈다. 해석하려는 여지, 이리저리 움직이려는 최소한의 여지가 그것이다. 이것은 곧 어떤 구조나 틀에도 들어맞지 않는 작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구조에 관해 알려 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지배체제에 관여하려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이 글은 기준을 가진 사회, 그곳에 들어맞지 않는 인간과 욕망, 그리고 들어맞지 않는 인간이 읊조리는 중얼거림-어떤 창조적 여지에 관한 글이다.

들어맞지 않음에 관하여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은 종교적 독단과 편견으로 인간의 자유와 삶을 구속했던 14세기 유럽의 역사를 배경으로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담은 추리소설이다. 수도사들은 금서로 지정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의 ‘희극론’을 읽고 처참히 독살당한다. 소설에서『시학』의 ‘희극론’이 금서로 정해진 이유는 매우 흥미롭다. 시의 비극적 정서는 엄숙함, 운명의 체념과 연결되지만, 희극적 정서는 어떤 사물에서 분리되어 거리를 두고 응시하는 것, 그 대상을 가볍게 여기는 자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 사회, 규범 등과 같이 절대적인 것을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하는 자세를 갖게 하며 이것은 곧 신에 대한 부정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불경하게 여긴 수도회는 결국 『시학』‘희극론’에 독을 발라놓는다. 이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역사적, 종교적 배경을 배제하고, 책이 금기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이것을 욕망하는 주체, 그리고 금기를 어기고 욕망을 실현한 인간이 규범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내러티브이다. 이것은 작금의 현실과도 조심스럽게 연결해볼 수 있다. 우리는 사회가 만든 일련의 조건, 즉 소속된 사회에서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을 요구받고, 이것은 곧 인간의 자유로운 욕망을 억제한다. 조건을 거부하고 욕망을 실현하는 자들은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소외되기 쉽다. 이렇듯 소설 속의 ‘금기’는 현실에서 요구받는 ‘조건’으로, 소설에서 ‘죽음을 맞이한 자’는 현실에서 ‘소외된 자’와 같다. 이렇게 역사에서 존재했던 ‘금기’는 작금에서 ‘극기’로 진화했다. 자기의 감정이나 욕망, 충동 따위를 스스로 눌러 이기는 마음을 말하는 ‘극기심’은 동시대의 세계화적 맥락에서부터 일상에서조차 우리에게 독려하는 진화된 금기에 불과하다.

 현대사회의 지배적 규범을 온건한 가면으로 담고 있는 극기심은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사회에 잘 ‘들어맞지 않는’ 이방인, 부적응자, 소외된 인물에 의해 불편함, 난감함, 의심 따위의 감정을 통한 부산물로 드러난다. 이것은 실제로 유실되어 현대로 전해지지 않은, 『시학』‘희극론’의 희극적 정서에 대한 움베르트 에코의 해석, 즉 한 걸음 물러서서 보는 것, 엄숙하지 않은 태도가 비판적 자세를 갖게 하며 나아가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연다는 그의 견해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 사회적 지배체제에 거리를 두고 이를 응시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극기심을 엄숙히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하는 자세,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 이런 자세로부터 발현되는 불편함, 난감함은 지배체제의 입장에서는 “불온하기 짝이 없게도” 새로운 것이다.

어떤 창조적 여지

이런 관점으로 정해련의 입장과 그의 작업을 생각해볼 수 있다. 오랜 기간 독일에서 활동했던 작가에게 한국은 모국이기에 익숙한 곳이면서도 오랜 유학 생활 때문에 생경하고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스스로를 이런 사회적·환경적 맥락 내에 들어맞지 않은 이방인, 객관적 관찰자로 위치시키며 생생하게 전달되는 불편하고 난감한 감정들을 감내하기보다 이들을 일련의 가능성, 창조적 여지로 이끌었다. 작가의 욕망과 사회의 욕망, 그 저변에 발생하는 부수적인 것의 대화, 새로운 인식 등을 익숙하면서도 언캐니한 사물의 설치로 풀어낸 것이다. 또한, 작업은 작가의 정서, 감정을 나타낼 뿐 아니라 타자, 사회, 제도와의 관계 내에서 번역되는 욕망 언어의 충돌, 조건들, 그리고 복잡한 부산물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순수하게 인식하려는 투쟁으로도 볼 수 있다. 한 걸음 물러선 관찰자, 이방인의 입장을 취하는 작가는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한 사회를 마주하는 동시에 작가 자신을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Das Schloß)』에 등장하는 K와 동일화한다. 작업 <Empty Speech>는 여기서부터 확장된다. 소설의 주인공인 K는 성의 측량기사로 불려 오지만 정작 성 안에는 들어갈 수 없는, 권위로부터 끊임없이 거절당하는 인물이고, 성은 가부장적인 지배체제, 권력기구를 상징한다. <Empty Speech>는 바로 이 소설에서 발췌한 ‘새로운 패배의 문장 목록’이라 이름 붙인 텍스트들과 자크 라캉의 논집 『에크리 (Écrits)』에서 발췌한 무언의 욕망 그래프를 투명 시트지로 레터링 한 뒤 거울지를 댄 표지판에 붙인 작품이다. K가 정작 성에 들어갈 수 없는 아이러니한 소설 속 상황을 정해련은 관습적으로 존재해온 기준에 들어맞기를 욕망하는 한국 사회를 마주한 연약한 작가 자신의 상황에 반영한다. 더 나아가 강요되는 타자의 욕망과 순수한 개인의 욕망이 부합되지 않아 발생하는 체념, 난감함, 불편한 정서를 시각화하며 그 안에서 상실된 주체의 ‘텅 빔’을 유연한 장소성의 유희를 통해 묘사했다.

<Handrail> 시리즈는 주체와 타자의 욕망 역학 범위 내에서 개인의 욕망이 해소되지 못하는 상태, 갇혀있는 상태를 상징과 은유로 드러낸 작업이다. 손잡이는 ‘잡는다’라는 유아기적 욕망의 행위를 상기시키기도 하는데 작가는 이 손잡이라는 오브제를 개념화하여 그 형태를 변형하고, 장소 특정적 설치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그리고 간결하게 묘사했다. 관람자는 기이한 모습의 손잡이들이 의외의 장소에 설치되어 있음을 목격하는 동시에 기능을 잃어버린, 나아가 관습적 기능을 해체하며 확장되고 추상화되어버린 손잡이와 조우하게 된다. 기능이 텅 비어버린 동시에 마치 새로운 손힘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는 손잡이들은 욕망을 이끌어 내는 무위의 기호와 같다.

예술적 창안으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으로

정해련의 작업은 욕망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며 이런 작가의 주된 관점은 초반 작업부터 최근 작업까지 이어진다. 작가는 이전 작업들에서 인간의 육체를 이용한 조형, 콜라주, 드로잉, 설치를 통해 그로테스크하고, 감각적으로 욕망에 대한 작가의 정서를 묘사했다. 최근 작업은 과거 작업이 추상적이고 기묘했던 것에 반해 정제되고 일상적이며 개념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작가의 유연한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다양한 매체와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주목하는 욕망은 끊임없이 증식되는 에너지인 동시에 타인의 시선, 사회적 인식, 나아가 역사, 종교, 환경적 맥락에 따라 제한된 범위 내에서 충돌하며 결국 부합의 지점에 이르는 유기체의 모습과 닮아있다. 증식하는 욕망에 있어 ‘부합의 지점’은 곧 욕망의 상실, 죽음, 소멸의 결과를 가져오는데 이런 맥락에서 개인의 욕망은 성장과 노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지속한다. 이것은 특수한 개인의 욕망에 대한 묘사라기보다는 특수함을 아우르는 욕망의 보편성, 어디에서나 반복되는 욕망의 순수한 움직임에 관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속한 환경으로부터 거리를 둔 입장에서 느낀 정서와 그로부터 발생한 자신만의 창조적 여지를 이렇게 욕망이라는 비가시적인 개념을 통해 시각화한 것이다.  사회적 지배체제와 욕망에 관한 정해련의 작업은 타자의 욕망을 강요받고, 개인의 욕망을 누르는 극기심을 요구받는 작금의 사회에서 카니발적 세계의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카니발은 지배적 진리들과 권위적인 제도로부터 인간을 일시적으로 해방시키며 규범, 금기의 일시적 파기를 축하하는 축제이다. 카니발에서는 기괴하고 독창적인 구상으로부터 자유로움과 가능성이 발현된다. 이곳은 계급과 지위가 존재하지 않고 순수한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장이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 욕망도 자유로울 것이다. 러시아 문학 평론가 미하일 바흐찐(Mikhail Bakhti)은 카니발적 세계관에서의 그로테스크한 형식에 관해서 “그로테스크한 형식은 구상의 자유로움을 밝혀주고, 지배적인 세계관, 모든 종류의 관례, 자명한 이치, 일반적이고 관습적이며 통용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고, 다른 세계 질서의 가능성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카니발적 세계관에 존재하는 그로테스크적 형식은 욕망과 새로움에 대한 상상과 의미를 제안한다.

정해련이 이방인으로서 한국사회에서 느끼는 불편하고 난감한 정서는 지배체제로부터 카니발적 세계관과 그로테스크한 형식이 거부당하는 현실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작가의 정서는 사회체제가 강요하는 아름다운 동화 같은 공간에 대한 안티체제로 작용했고, 이것에 관한 창조적 여지로 새로운 공간을 창조했다. 정해련이 창조한 공간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가깝던 것들이 갑자기 낯선 것으로 변하여 등장한 세계다. 이것은 냉정한 외피를 가진 그로테스크의 세계, 기묘한 혼합이 일상적 구조를 파괴하며 가능성을 가져오는 새로운 세계이다. 매체와 장소를 이용한 정해련의 유연한 사고는 체제와 억압에 대한 연약한 저항이며 한계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성, 욕망의 순수함을 새로운 틈에서 바라볼 것을 호소한다. 그리고 새로움은 우리가 스스로의 욕망에 대한 불확실한 기억을 조우했을 때 열리는 것이다.   현소영/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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