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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현 Jeong Ji Hyun : 오브제 속에 담긴 풍경 Jeong Ji Hyun : Objects contained in the land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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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시기간 2014-01-04 ~ 2014-01-14
  • 전시장소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전시개요

정지현의 사물들, 풍경들, 회화들
 
이글은 정지현의 회화들을 보면서 그가 만들어내는 미시적 시각과 연관된 그의 자연관과 특이성을 발견, 태도가 어떻게 그 작업에 작동하는가를 작가와의 대화를 토대로 정리한 에세이다. 정지현은 작업 속에 정지현식 시간을 채집하는 과정과 그 주름의 의미들을 그려내는 작가이다. 그의 작업에서 시간을 담지한 미세하거나 비물질적인 속은 작업에서 내보이거나 읽혀지지 않았기에 필자는 그 지점을 주목한다. 이에 그의 시간의 테두리에서 곧 버려지거나 사라질 것 같은 찰나적 사건과 사물에 기인한 어떤 깊이와 통찰, 욕망의 얼굴을 표면에 드러내는데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고자한다. 현대의 혼돈스러운 시간과 이미지의 홍수에 그가 접어놓았던 사물의 풍경을 펼침과 동시 사유하는 것이 이글을 정리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몇 년간 지속하고 있는 정지현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화면은 거대한 버섯, 브로콜리, 벌집, 만다린, 토마토 등 수분이 거의 증발된 주위에서 채집한 자연물의 섬유질을 해체하듯 화면 가득히 그 섬세한 인상들을 그려내고 있다. 화면은 실물크기를 벗은 신체적 반경의 사이즈로 재현되어 훤히 안팎의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으며, 때론 화면 전체를 볼 수 있는 몰입의 사정권은 사진적 리얼리티의 감각도 체험케 한다. 이렇게 전시장은 거의 변변치 못한 것들과 작업실 구석의 흔적들이 시간과 주름의 사건들로 옮겨져 숲과 그 속의 풍경이 되어 정지현식의 잠재성의 ‘장filed’에 배치된다.

말라비틀어진 섬유질을 가로지르듯 그려내는 감각은 먼저 그가 기용하는 질료에 대한 연구도 하나의 모티베이션이 된다. 그와의 대화에서 한지의 거친 표면에 검정의 콩테로 그려내는 것은, 그리는 행위에서 그어내고 지우고 비벼내는 디테일의 감각들 혹은 그림의 안과 밖을 소통하는 역동의 물질로 가장 유연한 재료로 기용했으며 또한 환경의 가변적 의미에서 퇴행하는 변질의 수순에 능동적인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재료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어찌됐던 그러한 재료의 기용은 그의 태도를 잔잔히 역동을 추적하는데 가장 필수의 질료이며 그의 기억의 범주를 마크하는데 가장 적절한 재료로 최적의 선택이라 여겨진다.

그럼 정지현은 화면 속에 채집된 시간과 퇴행적 주름들은 어떤 것일까? 또 그는 무수한 실제를 넘은 감각소여를 통해 보는 자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엔 그 삶과 몸의 대자對自에 흐르는 자연에 대한 감각이나 사물을 대하는 독특한 태態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와의 대화에서 유년의 시간은 촘촘한 자연의 풍경과 함께 그 숲이었고 숲은 현재의 섬세한 떨림을 길어 올리는 우물이자 커뮤니티며 매개자였다. 이에 자신의 몸에 기록된 자연관을 어떤 경계와 위치에서 사물을 우의적으로 바라보기를 즐기는 것이며, 그 엉켜진 숲의 여정에 관람의 시선을 그 몸을 이동에 따라 여행케 하는 것이다. 이에 그의 화면을 마주할 때면 거대한 사물이 아닌 풍경을 옮아 온 듯 장소로 변이되며 어떤 공간으로 읽혀진다는 것이다. 화면의 버섯줄기와 브로콜리는 거대한 산과 절벽의 풍경으로, 겹겹의 흔적이 쌓인 벌집은 거대한 떠있는 섬으로, 말린 만다린은 어떤 찢긴 블랙홀의 시공간처럼 마주하게 된다. 또한 그 시선의 손끝으로 확대된 거대한 화면들은 무수한 경계를 일탈하고 사물이 아닌 어떤 장소, 기억들로 안내한다는 것이어서 보는 자들을 어떤 일탈의 선에 위치시킨다.

또 그의 그림의 관람에서 변별력이 감지되는 특이성의 지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에 그가 화면을 감각하는 것은 시뮬라크르의 공간이며 생성과 해체가 반복되는 지속의 공간이다. 화면은 정지현식 감각 덩어리를 애무하며 사유하는 곳, 그 감각덩어리를 무수히 그리고 덧입혀 지우고 뭉개는 행위를 마크하는 일차적 영토이다. 이에 어떤 목적의 지점으로 향하는 형상을 얄궂게 배반하는 재현의 감각들이다. 사물에서 풍경으로, 풍경에서 숲으로, 통로 없는 숲을 이리저리 미로의 길을 열어놓아 끝내 다다른 지점이 정지현의 그림이 도착하는 곳, 또는 완성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정지현의 사이트에 서서 보편의 선험(브로콜리, 벌집, 만다린 등)들을 인식으로 해체해 마이크로의 눈으로 이행되는 섬세한 길들을 역추적 하는 것이 그의 화면을 천천히 관람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지현의 그림은 무수한 자기 해체적이다. 정지현의 그림은 일종의 동일자의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는 의미를 넘어 디지털론에 가까운 개념을 지녔다. 그리드형식으로 긋는 몇 개의 반복된 코드는 사물이 지닌 세부를 해체하고 영토화하여 그 미세한 세부의 존재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와해되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무엇을 그리겠다는 욕망은 수많은 셀을 만들며 지루한 숲속을, 엉켜진 마른 섬유질을 통과하며 그 여정의 퇴행된 흔적만이 증식된 것이다.

정지현의 작업은 몸적이며 촉각적이다. 몸은 오랜 기억과 수행에서만 작동하는 것이라면 정지현의 화면들은 몸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서만 그의 작업으로 이행되기 때문이다. 어느새 몸을 드로잉의 도구로 일치하는 순간 그 여정을 보는 이와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정지현의 작업들은 촉각적이며 그 느낌을 일깨운다.

예술가 엄기홍은 그의 작업 ‘인식론적 기념비’에서 시각대상은 몸에서 ‘떨어짐’으로서 ‘인식’된다면 촉각대상은 몸에 ‘다가옴’으로서 ‘느껴’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느낌의 세계는 앎의 세계보다 거짓이 없고 포근하며, ‘앎’이 공간적 명료성을 표상한다면 ‘느낌’은 시간적 친숙감에 의지하는 만큼 ‘몸’적이라 하였다. 인식보다 느낌의 세계가 더 어리기/여리기 때문이다. 본 것(to see)과 보여진 것(to be seen)의 불일치, 근대의 이상이 일치였다면 탈모던은 불일치, 상상의 열림이며 분석적 개념이 아닌 시가 나온다는 것이다.

필자는 현대예술이 필히 보편적 ‘소통’의 문제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도르노 혹은 미학자 진중권 역시 현대예술의 소통 불가능성을 외려 미적 축복으로 여긴다. 예술이 소통 관한 것 혹은 소통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그 예술을 바라보는 소통이 부재한 보편적 동일자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 정지현의 작업을 들여다보면서 그가 만들어내는 감각이 단지 어떤 문제와의 척도를 좁히기 위한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독특한 타자의 영역, 개별자의 영역을 탐구한다라는 인상을 받았다. 무수한 기억의 실타래를 엮는, 그 난해한 출구 없음을 이 ‘사소함’의 사물과 흔적에 발현을 기대하는 정지현의 몸적 풍경들. 필자도 순항하는 그에게 색다른 도발이 있길 기대한다.  김복수/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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