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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석 Oh Youn Seok : 물질적인 정신 Matter & Things Matter &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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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명
  • 전시기간 2015-01-22 ~ 2015-02-01
  • 전시장소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전시개요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아티스트 릴레이전 14번째로 오윤석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오윤석은 문자이미지를 통한 신체성의 변주를 다양한 방법론으로 드러내는 독특한 작업을 추구한다. 그의 초기 작업부터 최근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신체적 에너지 즉 몸의 기운을 진단하고 그와 관련된 물질성을 바탕이 된 재료의 추구로 이어진다. 은銀을 이용한 설치작업, 문자, 특히 한자를 이용한 드로잉과 페인팅 작업, 종이를 칼로 도려낸 작업과 그 끝을 촉수처럼 말아 올린 작업 등 그는 매번 다른 불안전한 신체성, 촉각성을 이미지화 한다.
그는 작업의 주제와 소재에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둔 동양적 사상들, 사유, 즉 기운생동의 문맥 속에서 작업을 풀어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작업들은 어떤 되기being로의 신체적 몰입으로 종이를 베고, 꼬고, 또는 문자를 쓴다. 어찌보면 그 어떤 신체-되기들의 이미지들은 뭔가 편집증적인 광란이었다가 또 하나의 해체적 흔적이었다가, 오윤석식式의 미시적 드로잉이다. 그의 작업들에서 또 다른 특이점은 작업의 물질성의 외연보다는 비물질적, 직관적이고 활동적이다. 논리적 방식의 분석적인 방법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닌 무수한 기氣들의 분절들과 활동을 종이를 도려내기와 거친 쓰기(드로잉), 매듭으로 완성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가 몸적 대체물로 기용하는 재료, 종이는 그 기운생동을 탐닉하는 대상이면서 무수한 개념들을 무참히, 촘촘히 베어내는 ‘배제’의 대상이기도하다. 이렇게 단단하고 날카로운 선과 부드러운 표면이 만나게 되는 지점에서 오윤석의 예술은 탄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작업들이 신체성을 띄는 또 하나의 단서는 관람객을 무수히 어떤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시각은 문자로 인식된 이미지들을 문자처럼 문자와 문자 사이를 읽어내려 가다 어느새 오윤석의 감각으로 고문서를 읽어 내려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오윤석식式의 문자 드로잉들은 그 문자-되기를 통해 무수한 이미지의 입구로 들여보내고 사유의 출구로 안내한다.  /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예술의 기원과 이미지

예술에서 역사는 작품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건들에 대한 작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물리적인 현실이다. 말하자면 예술작품은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정신적인 반응이 감각적으로 자료화 되는 과정의 축적인 것이다. 그러나 오윤석의 작품에서는 역사를 초월하는 다른 영역들이 작가의 예술적 궤도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생명성과 소멸의 과정에 관한 작가의 관심과 더불어 예술의 기원을 암시하는 종교적 양태들에 관련된 선험적 세계와 작가의 작업과정에 내재된 예술의 목적성이 드물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작품을 비롯한 세속적인 존재에 스며들어 있는 소멸된 시간과 새로운 생명이 드러나는 과정이 의미의 공간적 구조화라는 테제를 파괴하면서 다른 모습의 새로운 가시적 형식으로 스스로를 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삶과 예술의 탈역사적 조합을 포착해 내기 위해 텍스트를 활용한다. 역사적 특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매체는 문자이기 때문이다. 문자를 통해 인류는 삶의 방식을 기록하고 사건들을 기록함으로써 의미의 영역을 텍스트로 그리고 텍스트를 사유의 영역으로 포함시켰다. 이런 면에서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추상적인 정신을 표현하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고, 역사는 텍스트를 통해 사유의 형식을 만들어 왔다. 오윤석의 작품에서 텍스트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초기작품들에서 불교경전이나 한국의 토속종교와 관련된 텍스트들을 작품의 구조적 의미와 형식적 내용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텍스트는 원시시대의 동굴벽화처럼 주술적인 힘을 가진 치유의 상징이기도 하고, 정신적인 피폐함을 위로해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가 문자를 통해 문화와 문화의 이미지들을 바라보는 방식과 연결된다.  21세기는 미술의 역사에서 새로운 개념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매체의 탄생을 가져왔다. 기술적으로 조정되는 기기들을 통한 이미지의 생산이 미술의 감각데이터로서의 기능적 한계를 초감각의 사유 체계로 확장시켰다. 말하자면 기술적인 이미지들의 생산은 기존 예술의 재현적인 구조가 가지고 있던 많은 요소들로부터 해방되었다. 이런 변화의 지평 위에서 불변적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삶의 다양한 양태들, 예를 들면 정신의 불변성이나 개인의 인성, 삶의 본질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사건들과 같은 것들이 새로운 예술을 통해 물질적인 차원뿐만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차원들에 관한 레퍼런스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술이 공간의 관점에서 변화와 운동이라는 시간의 관점으로 전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삶의 지속성에 대한 설명은 하나의 프레임 속에 정착된 그림과 같은 형상을 예측할 수 있게 해주지만 새로운 기술미디어의 양태들은 시간의 변화 속에 감추어진 개별 순간들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들에 집중한다. 헤겔식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정체성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부정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의 상황 속에 거주시킨다.      
(중략)
그러므로 작가는 초기 작품에서 텍스트를 통해 그의 작품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종교적 차원들을 인간적 개념들로 환원시켜 구체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되어 있는 예술적 내용과 삶의 양태들을 객관적 실체로서 제시하려고 하는 미학적 의식의 충돌로 인해 작품을 통한 의미생산의 의지는 자칫하면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경험의 세계로 환원될 수도 있는 위험에 빠진다. 일반적으로 객관적 의식의 세계는 삶을 제어하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삶의 행위들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런 행위들 속에는 인과적인 필연성이 내재해 있다고 하는 인식 위에서는 결정론적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과성의 세계는 예술의 세계가 아니다. 인과성은 개념적 선후관계에 대한 경험적인 언급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철학적인 차원의 의심의 세계에 머물러야만 한다. 단순히 과학적인 확실성의 세계, 즉 인과론적인 결정론이 지배하는 세계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독일의 작가 게르하르 리히터는 자신의 기억들을 이미지 속에 넣는 방식으로 사진적인 이미지의 불확실성을 선택한다. 그에게 사진은 그의 과거의 기억들을 물질화시켜주는 것이고, 그런 기억들을 그는 회화를 통해 지워나간다. 그리고 남는 것은 기억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이미지이다. 물질을 비물질화 시키는 방법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윤석 역시 최근의 <Hidden Memories> 시리즈 작품들에서 그의 예술에 대한 형식충동과 구조화의 요구를 이미지 자체로 순화시킨다. 그러므로 텍스트를 이미지로 순환시킴으로써 혹은 다른 물질적 기억을 매개하는 매체들의 존재성과 그에 대한 기억을 지움으로써 예술을 비물질의 영역으로 편입시킨다. 오윤석에게 기억은 텍스트와 인간의 삶의 조건들과의 관계이다. 그 관계는 한편으로는 대립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삶 자체이기도 하고, 또는 존재의 조건들이기도 하다. 의미의 역사가 시간의 개념을 고착시키는 것이었다. 의미를 증발시켜 현실을 재생하는 방법적인 구체성은 역사적 조건들과 범주로부터 자유를 획득하는 예술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은 행위의 물질적인 구체화가 아니라 삶의 구체성이 예술을 통해 드러나게 함으로서 예술자체를 하나의 구체적인 행위로 등식화시키는 것이다. 이미 예술은 그렇게 존재해 왔고, 오윤석의 예술에서 작가가 성취하는 것은 예술로 부터의 해방이다.   정용도/ 미술비평가

작가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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