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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NGJU MUSEUM OF ART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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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식Lee Gyu Sik : 집착 Obsession Obs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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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명
  • 전시기간 2015-10-01 ~ 2015-10-11
  • 전시장소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전시개요

2015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는 입주기간동안 작품성과물을 프로젝트 형식으로 선보이는 아티스트 릴레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아티스트 릴레이 전시는 스튜디오 전시장에서 그간 작업했던 결과물에 대한 보고전시로 해마다 작가 자신의 기존의 성향과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감각과 역량을 보여주는 전시로 개최했다. 이에 올해 9기 작가들의 전초 전시로서 선보였던 ‘워밍업전’은 어떻게 개개인의 코드와 미적 언어들을 하나의 전체성으로 풀어낼 것인가가 관심이었다. 그 후 작가들의 작업을 풀어내는 워크숍을 통해 그간의 작업과 앞으로의 방향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에 좀 더 개인 작업에 집중하는 릴레이 전시 프로젝트는 체류하는 동안 기존 자신의 방법론을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새로이 전달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개별 스튜디오에서 전개하는 독특한 아이디어들의 기록과 실험적인 날 것의 이미지, 불완전한 예술적 의미, 모호하고 불편한 상황들을 전시장에 잠시 머무르며 그런 첨예한 문제들을 관람객과 나눈다. 이에 현장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우리에게 현대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통해 동시대의 미감에 대해 교감을 나눈다.

 이에 다섯번째 릴레이 전시로 이규식 작가의 전시를 개최한다. 이규식의 최근 작업들은 ‘쓰기’ 혹은 ‘드로잉’으로 시작된다. 그의 작업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쓰기’로 시작되는데 그 쓰기는 건축물 내부의 빈 유리창부터 일정하게 재단된 천위,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의 어굴 혹은 어떤 사물 등등, 마치 그 시간과 공간, 인물에 대한 자신과의 교감을 답하듯 무심히 써내려간다. 이렇게 써내려간 문자는 어느새 그리는 행위의 시간으로 관통하고 다시 그 자신으로 돌아와 입으로 불경을 독송하며 삼천배를 올리듯 자신을 수행케하는 지점으로 읽혀진다. 이규식 작가의 쓰기 작업들은 무수한 이미지들을 재현하려는 여타의 예술적 행위들과 변별을 갖는데 그 비물질적 이미지, 행위들은 ‘무엇이 예술적 삶을 가능케 하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 오랜 쓰기의 작업들은 그간 예술행위에서 많은 개념 예술가들의 방법론이었다. 시간을 쓰기로 기록하며 무한을 표현하는 로만 오팔카나 온 카와라의 작업개념에서 유사한 지점을 찾을 수 있지만 이규식의 독특한 쓰기의 방법은 어떤 대상을 끊임없이 부르기부터 연유된다. 세상에 널려있는 목적 없는 타자들 혹은 자신과의 사이에 있는 인과성이 있을 존재들을 끊임없이 부르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작업에서 숨김과 여과 없이 지속적인 쓰기의 수행으로 드러내어 하나의 시각적 과정만을 보여주는 것을 원칙으로 모든 타자에 대한 열려 있음이다. 이 이규식 식式의 ‘쓰기연구’는 그가 앞으로 더 지속할 개인과 사회 안에서의 예술적 행위이자 태도이며 끊임없는 자아의 해체적 과정이다.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작가노트1

집착에 관한 4개의 독백

하나, “......”

둘, 미술작품에서 완성이란 일정시간 경과 후 원하는 만큼 만족한 상태에 도달한 경우를 말한다. 만약 일정한 규격이 정해진 바 없고 도달점이 분명하지 않다면 애초부터 완성의 기준이 없으므로 미완성이라고 단정지울 근거도 없다. 삶이 완성에로의 믿음만 있을 뿐 완성이라는 목표점이 없는 것처럼 작업 역시 가늠할 수 있는 무언가를 향해 나아갈 뿐 애초부터 이르고자 하는 그곳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 예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저마다의 이유가 흐릿한데도 불구하고 오직 또릿한 한 가지는 쉼 없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완성도 미완성도 따져볼 필요 없이.

셋, 시지프스 이야기는 매일같이 돌을 이고 나르는 것이 다일뿐 산꼭대기까지 옮겨놓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 돌은 신들의 농간이 아니더라도 절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세상의 구성원이며, 이 세상의 구성물 중 어느 것도 그 모습 그대로 영원한 건 없다. 보이는 모두를 그대로 단정할 수 없으며 인식할 수 없다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의내릴 수 없는 이유다. 현재의 이유가 이유로 충분치 않으며 현재의 부정(不定)이 딱히 부정이라고 할 수 없는 모호함으로 가득한 현재를 적응하려면 스스로를 외면과 고립의 상태로 이끌어 그럴싸한 선동과 구호에 현혹되지 않는 수밖에 없다.

넷, 나의 작업은 자아를 향한 집착에서부터 시작한다.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끼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고 싶은 욕구는 주어진 세상에서 자기실현방식이란 걸 발견해냄으로써 얼음장 같은 외면과 고립에서 벗어나 따뜻해지고 싶어 한다. 고로 삶은 필시 저항이다. 예술은 거기 어디쯤 머물고 있다.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수단인 채로.

작가노트2

사진은 회화나 조각 혹은 설치와는 다른 만족감이 있다. 1인칭 주인공 시점보다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사물을 보고자 할 때 익숙한 도구가 되어준다.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별도의 노력이 없이도 대상이 주는 느낌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게 편리해서 좋다.

아파트로 이사를 가려고 낮은 층과 높은 층 두 개의 집을 소개 받았다. 거실에서 정원과 나무가 손에 잡힐 듯 시야에 들어오는 낮은 층에 마음이 가지만 높은 층의 트인 전망에도 마음을 뺏겨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다른 누군가로 임자가 바뀌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삶을 선택하고 싶다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 게 먼저인 셈이다.

‘나는 누구인가’

갈등과 번민을 부추기는 집착이 분명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가져다준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문제해결보다 문제제기에 역할이 있다. 나에게 예술행위는 인간의 완성을 위한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인지 본래의 모습을 기억해내기 위함이다. 작업이 나를 완성시킬 수는 없지만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해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남과 북, 동과 서가 서로 융합을 이루는 게 좋은 건지 등의 현실문제 역시 시대적 상황논리를 앞세운 위정자들에 이끌리지 않더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할 수 있다면 스스로의 판단을 믿을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닌 살아보기 위한 삶을 고대하는 마음에서다.

작업매체와의 인연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분명하지 않다. 내가 먹는 밥이 어려서부터 먹어온 탓에 습관이 돼버렸듯 작업의 도구나 재료 또한 우연한 인연에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습관이 돼버린 관계다. 그 인연에 의미가 있다면 내가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익숙함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연이란 것이 눈길이 머물고 마음이 가서 손길이 닿는 것 이상의 의미가 또 있는지.   2015. 이규식

작가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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