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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문 개인전 <누(淚)-索然(삭연)-lácrĭ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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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명 배정문
  • 전시기간 2017-10-21 ~ 2017-10-21
  • 전시장소 오창전시관

전시개요

2017년 오창전시관 대관전

배정문 개인전 <()-索然(삭연)-lácrĭma>


  이번 네번째 개인전은 삶의 기억, 그 중 슬픔에 관한 명상이다. 작품의 주 재료는 밀납과 배() 형태의 철조와 인체 브론즈, ()브론즈, 백화(白化)된 천연 산호이다. 밀납은 그 녹는 성질을 이용하여 눈물-슬픔-상처-소망의 의미를 표현하고자 재료가 지닌 기도, 소망, 주술, 의례의 함의를 차용한다.

  동서고금의 설화 속에서 망자(亡者)는 사자(使者)와 동행하여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저승으로 떠난다. 조각조각 용접된 철단조 배의 외형은 삶 속 기억의 편린과 조각난 슬픔을 은유한다. 철조의 배 안에 잠재된 기억과 슬픔이 녹아 또 다른 자아를 은유한 밀납 배와 백화된 산호 위에 눈물처럼 떨어져 삭연의 모습을 실연한다. ‘(비즈왁스)’는 우리 삶, 특히 제의(祭儀)에서 산자와 죽은 자의 매개이고 사자(使者)는 망자(亡者)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매개이다. 고개 숙인 채 길게 변형된 인체는 팔과 다리가 길게 식물 줄기처럼 땅으로 내려 백화된 산호 조각들에 둘러쌓여 있다. 산호는 작품의 안과 밖을 구분 짓는 섬이다. 현실과 저승의 경계이고 낮은 담장이다. 인체는 산자와 죽은 자의 영혼이다. 살아서의 기억과 죽음 이후의 기억은 그렇게 시각적으로 조형화된다. 현대사회에서 촛불은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시각적 아우성인 동시에 기원과 소망을 담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삶과 죽음의 기억을 발효시켜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현실의 거울과 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투영하는 명상의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운명은 신이 던진 질문이라고 한다. 그 질문의 답은 우리 안에 있다. 이번 작품을 매질로 각자의 삶에 대한 반추를 통해 선험적 기억, 묵은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고 진실을 드러내 투명한 내면과 마주하는 명상의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

 

철조와 조각보

  설치작품 - 삭연索然 - 눈물lácrĭma은 각양각색의 천연 밀납을 조직(組織)한 작품과 조각조각 파편화된 철조각을 이어붙인 작품이다. 가지각색의 보잘것없는 조각을 모아 하나의 작품으로 통섭한 능숙한 솜씨와 탁월한 미적 감각의 산물인 조각보처럼 무명(無名) 여인이 만든 조각보에 담긴 절실한 한()에 대한 사회적 경험을 공감하는 인간애를 닮고 싶었다. 정치·사회적으로 배제된 계층인 조선의 여성들이 가졌을 한(), 조각보에 함의된 상처의 조각 조각들처럼 각각의 배 모양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망자들의 기억과 슬픔이며, 산자들의 절규다. 육중한 철조배에서 떨어지는 촛농은 그들 모두의 한()이 짓무른 눈물이다.

누구에게나 상처로 인한 마음속 흉터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타인은 물론 자신의 상처를 보듬는 일은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공감의 마음이다. 공감은 나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아픔에도 관심을 갖겠다는 선택이지만, 자신의 상처를 배제하면 허망한 지적사치이다. 우리 안의 슬픔이 잉태한 상처는 아픔에 대한 적나라한 지적 구조가 낫게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야 아물고 새살이 돋는 법이다. 다만, 그 시간은 참으로 길다. 시인 시어도오로스케는 어둠 속에서 눈은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라고 읊었다. 밤이 가장 어두워야 별이 밝게 빛난다.

 

상명지통 喪明之痛

공자의 제자 자하가 외동아들을 잃고 슬피 울어 눈이 멀었다.

 

  우리의 삶은 태어나서 생명을 얻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가는 방식으로 살아진다. 수많은 생명들이 덧없이 사라지고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 속에 깊고 파란 상처를 낸다. 인연은 늘 잘게 쪼개져 헤어짐으로 파편화된다. 그러나 만남은 그 자체로 신의 축복이 아닌가. 축복 blessing은 상처 입히다는 불어 blesser에서 나왔다. 축복은 종종 상처와 고통 속에서 온다. 산고의 고통이 그러하다. 만남은 결코 존재의 모자람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남이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는 마르틴 부버의 말처럼 잉여의 만남은 없다. 잘못된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반복적으로 습관화된 죽음에 대한 산자들의 태도는 삶이 필연하는 모든 죽음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 결과이다. 사랑하는 조카의 이른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절망이 아니라 절망의 무덤을 보았다.

 

산호(珊瑚)

  작품 안의 백화된(bleach) 산호는 원시대기를 형성한 산호의 죽음이 초래하고 있는 심각한 지구의 환경변화를 암시하고 그 종범이 인간임을 고해하고 있다. 이는 생물학적, 물리적 환경 변화는 물론 인류의 물신화된 사유(思惟)와 통견(洞見)의 방향을 의미한다. 동시에 생명의 시작과 소멸, 바다의 상징이다. 숨이 멈춘 다음의 슬픔과 상처인 동시에 생명의 기원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이다. 하얗게 타들어간 산자들의 고독(孤獨)한 절망과 석화(石化)된 아우성이다. 제도화된 사회 부조리의 결과로 희생된 수많은 자식들과 부모들, 동료와 친구, 연인과 형제들의 파편화된 모습의 단면이다. 세월호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전시를 전통 상례문화를 입혀 시각화했던 2015년의 개인전 후 지난 2년간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의 의미를 담아 보고자 기획한 것이 올해의 전시이다. 남아있는 자들의 슬픔과 아직도 보내지 못한 통곡의 마음을 작품에 담고 고통을 수단으로 절실한 그리움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타인의 죽음과 삶을 들여다 보는 가운데 조카의 죽음을 맞았다. 판단과 인식의 눈이 아닌 기억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지금쯤 사랑하는 조카는 어느 길 위에 있을까. 호모 비아트로 homo viator는 떠도는 사람, 길 위의 사람을 의미한다. 공간의 이동만이 아닌 시간의 이동을 포함하며 현재에서 미래, 탄생에서 죽음, 기억에서 망각, 존재에서 소멸의 길을 나타낸다. 삶은 길이 아니던가. 길을 만들고 따라가며 숨고르는 여행이 아니던가. 여행은 고난 travail과 어원이 같다. 삶은 평평하지 않다. 자연(自然)은 어떠한가. 자연은 기억을 저장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늘 어제의 현재, 오늘의 현재, 내일의 현재만이 존재하는 듯 하다. 나무는 잎을 축적하지 않는다. 자연이 다 그러하다. 나무는 자신의 무게만큼 잎을 간직하다 이치의 때가 되면 미련없이 버리고 산다. 나무의 자기성찰이고 자연의 자기성찰이다. 성찰은 자신을 보는 일이다. 그것은 자책이 아니라 자성이며 깨달음이다. 그리고 곧 우리가 맞이할 비움이다. 신에 순종하는 마음을 왜곡해 온 지난 몇 달의 시간이 어리석은 이유이다. 결국 지혜란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돛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닌가.

 

()

  작품에 표현된 양의 자의적 형태와 해석은 제의로서의 물성과 신성에 대한 경외, 사자(死者)를 위한 제물(祭物)이다. 동서양을 통틀어 인류 역사에서 양은, 신에게 소망하고 순종하는 의미로 그 쓰임이 오래되었다. 죽음과 삶에 대한 애통(哀慟)을 넘고자 하는 절절한 기도이다. 제의로서의 양은 자신을 비우고 신에 순종하는 영성에 대한 내적 결백을 조형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러시아 정교에서 우밀레니에 umilenie는 자비와 연민 순종의 정신을 가리킨다. 우밀레니에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각성하고 겸손과 온유, 연민의 마음을 담아 조현언어로 드리는 기도이며 고백이다. ()의 조형화안에 우밀레니에 umilenie를 담고 싶었다.

  수많은 기억들이 응고 consolidation와 재응고 reconsolidation를 반복하며 진화한다. 진화 evolve는 나아지는 progress 것 이 아니라 달라지는 change 것이다.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간직한 과거를 보듬어 안고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고통에 안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미처 보지 못한 아름다운 기억들을 발굴하고 끄집어 내어 햇볕에 노출시켜 소독해야 한다. 망자가 산자에게 남겨준 애틋하고 정직했던 그 때를 회상하는 일상이 삶과 죽음의 벽을 넘어 공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작품이 누구나 아름답게 보는 장면을 이미지로 담는게 아니라 세상을 자기 눈으로 아름답게 인식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태도가 지적 수고를 거쳐 가다듬어지는 일은 삶이 인식의 단순한 실현이 아니라 근거인 이유이다. 사회적으로 이미 보편화된 지적 체계를 내면화하고 자아의식을 단단히 하여 나라고 믿는 사회 구조 속의 나는 종속적 주체이다. 내면화된 자신의 통절한 슬픔을 마주하는 능동적 주체성이 선행해야 하는 것은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다.

  개인사를 포함한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실천하는 지적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이다. 독립적 주체는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의 힘에 의지하여 세계관을 갖는다. 그들은 대답이 아닌 질문을 하고 생각의 문을 연다. 질문과 호기심이 부패되지 않고 밖으로 명료하게 튀어나올 때 바른 질문이 된다. 지적인 체계가 가진 기능에 의존하지 않고 상상과 창의를 발현하는 질문의 필요성, 지성이 가진 상상력을 인식하고 탐닉하는 일이 통찰이다. 사유의 노예습성을 버리고 안과 밖을 고루 보는 눈이 그 안목이 절실하다. 가치관이나 이론, 신념은 부패되어 간다. 새로운 무엇인가가 곧장 다가오기 때문이다. 통찰을 통해 슬픔과 상처를 발효시켜 낫게 하는 일이 필요한 까닭이다.

 

  철 조각, 밀납 조각, 산호 조각, 촛농 조각, 그들을 잇고, 겹치고, 붙이고, 녹이고, 모아 조형화된 형상들과 제단의 양()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내 자신의 의식을 통찰함은 물론 산자들의 기억과 망자들의 혼을 달래고 안아주고 싶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천주님께 귀의한 사랑하는 조카의 영혼에 큰 아빠의 기억 조각과 슬픔 조각, 사랑조각을 모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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