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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27.~ 2022. 12. 11.
청주시립미술관 로컬프로젝트 2022
작성 김기현, 미술칼럼니스트


우은정 “참 아름다운 신화의 시간” 전시 리뷰
- 드로잉, 절편의 대립과 개체화된 자아 들여다보기 -






0. 드로잉
선은 작위적 행위로 인해 드로잉이 되고 드로잉은 정형이든 비정형이든 이미지로 확장 된다. 드로잉에서 화가에 의해 대상 이미지를 창의적으로 변형한 것은 선의 에너지이자 선(線)에 의한 선(禪)이다. 선이 참선의 행위로 작가가 자신을 구도의 길로 들어서 본성을 대상과 일치 시키려는 것은 화가 우은정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다시 말하면 행위가 작품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행위에 몰입하여 표현한 선에서 미적 영감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골기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뼈대의 기질을 지칭하지만 서예에서는 필력이다. 선은 힘은 이 골기이고 드로잉의 선과 속도는 자아를 무아로 만드는 힘이다. 우은정의 드로잉은 반복적 복합 행위로 명상에 접근하여 자아의 인식과 동일 시 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사이 톰블리(미국화가)와 다케사다 마츠타니(일본화가)의 드로잉에서 볼 수 있듯이 배경과 작업 형태, 선과 행위에 따라 작품의 의미를 각각 다르게 나타낸다.
우은정의 드로잉이 앞의 두 작가 톰블리와 다케시다와 다른 것은 동양 선법 중의 하나인 기운생동이다. 톰블리나 다케시다가 거대한 움직임인 동(動)이라 한다면 우은정은 정(靜)의 순간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후에도 기술을 하겠지만 밤의 시각에서 선택한 물상의 이미지화이기 때문이다. 분별력은 이미지 생산의 중요한 시각요소이고 이로 인하여 물상의 공간이 연출된다. 선을 내용으로 접근하면 과정에 해당하는 조형의 기본요소이다. 과정의 가치를 작품의 완성으로 접근하는 다양한 방법들에 의해 드로잉의 폐쇄성을 극복한 것을 우은정의 전시에서 볼 수 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화제와 같은 텍스트도 드로잉과의 소통이자 한 부분이다. 텍스트는 상상력을 극대화 한다. 그 이유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통용될 수 있고 이해 가능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표이든 기의이든 드로잉에서의 텍스트도 이미지로 해석하고 상상력으로 분석된다. 이를 정보의 전달이나 기호체계에 머물려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미의 속성은 근본 안에서 결코 변화될 수 없는 작가 자아의 상이다. 미적 이미지이나 한때 미완의 회화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드로잉은 그 영역이 해체가 되면서 확장의 물결은 이해 불가의 경지가 되었다. 결국 내면세계라는 오묘한 해석으로 자유로운 진취가 드로잉의 미학이 되었다. 드로잉 회화의 미는 드로잉간의 형식적 대립으로 개념간의 충돌이 개념적 표현으로 전환된 것이다. 작가가 이미지를 탄생하는 일은 그것이 미이든 추이든 본성의 속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많은 화가들이 낮이라는 시간의 선택과 낮에서의 빛을 따라 음영과 색을 택한다면, 우은정의 미는 어둠이 생기고 그 어둠이 사라지는 교묘한 시간의 드로잉으로 기의에 의한 자기 해석으로 이해하고 싶다. 하지만 사라진 어둠 뒤에 그에게 다가온 것은 내면의 성적(性的) 대상과 그 대상의 자율표현으로 완성이 되어 진다. 물질을 비 물질화 하고 다시 물질에서 형상을 찾아 자아를 흡인한 여인들의 드로잉은 작가에게서 자신을 되묻고 있는 대화법이다. 드 쿠닝의 거만하고 오만한 여인 드로잉이 속물적 블랙 유머의 작업으로 격정적 형상을 이야기 한다면 우은정의 여인 드로잉은 왜곡된 형상 드로잉이라는 의도성과 함께 우연성의 감정 표현이다. 우은정의 여러 드로잉이 하나의 역할 론으로 볼 때 작가의 의도된 내면을 순수하고 성실한 드로잉 표현은 그 만의 미학으로 보여 진다.




1. 신화
신화는 통시적通時的이거나 공시적公時的 천작天作으로 인하여 개인의 아름다운 욕망으로 자아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신화가 말소리에 따라 뜻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음운은 신화의 언어 이미지도 종과 횡의 변천과 변이, 관계로 의미 해석을 달리 하게 만들었다. 필자가 우은정의 ‘참 아름다운 신화’ 전시의 리뷰 시작을 통시와 공시의 개념 도입을 한 것은 그의 작품이 축적되면서 절편으로 쌓이는 시간적 영역을 찾기 위해서 이다. 여러 시대에 걸친 현상과 특징을 통시적이라 하면, 어떠한 시기의 현상과 특징을 이야기 할 때는 공시적이란 말을 쓰게 된다. 우은정의 작업 겹겹이 통시이던 공시이던, 그가 한 세대 이상을 작업한 것으로 본다면 충분히 공시적일 수 있다. 이유는 이렇다. 그의 개별화된 채색의 작품에서 전시마다 하나씩 그가 보행한 흔적들을 그림으로 누적시켜 왔기에, 주제로 집적된 관계로서의 형식과 개념은 시기 시기의 의식의 환경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개인적이거나 사회 통용적임에 따라 빠롤과 랑그로 나누어진다면 신화의 주제 언어는 공시태로 보아야 한다. 물론 그의 작업이 발전을 하거나 진화를 하는 상황과는 차이가 있기에 다분히 필자의 개인적 주장이기도 하다. 신화를 미적 의미로 담기에 따라 그는, 작업의 취미로 보아 신기한 변화이기 보다는, 일부 개인의 초자연적 존재와, 그 개인적 예술 활동으로 공통감에 의한 보편타당이다. 우은정의 신화는 개인의 신화로 과거, 현재, 미래의 연결 구조를 구조화 하였고 이를 회화의 영역으로 수용한 것이다. 결국 그의 야행은 걷기의 수행으로 미로 같은 고통의 어둠 찾기가 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위한 방향성 제시 행위로 다다르려는 곳을 여러 형태의 그림으로 작위적 표현을 피하지 않았다. 비교신화 학자인 조지프 캠벨은 자연세계의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이해하고픈 갈망과 공동체 내에서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신화의 발생은 가능 하다고 하였다. 덧붙여 만족스런 형성에 대한욕구, 그리고 우주의 광활한 경이와 신비 안에서 개인을 알고자 하는 갈망을 개인의 신화, 즉 인간 존재에 대한 핵심으로 보았다. 의식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개인의 신화는 신뢰와 감정에 의해 이미지화 되고 개인의 경험이 재 인식과정에서 재 이미지화 된다.
화가 스스로의 지도를 그려놓고 그 안에서 선을 그으며 신화로 기록하는 것을 우리는 드로잉, 그림, 미술이라는 미학적 용어로 표현을 하기도 한다. 우은정 작가는 ‘참 아름다운 신화(神話)의 시간’ 전시에서 나의 작업 과정과 내러티브가 중점적으로 연출됐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이야기 하며 나는 스케치북을 들고 전국 곳곳을 걸어 다니며 자연에서 마주한 나무를 그렸으며, 이 드로잉들이 축적돼 작업의 토대가 됐다고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의 작업은 전지크기의 종이에 그린 나무 드로잉 연작들은 내가 밤길을 걷는 동안 체감하며 느꼈던 적막감을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것이다. 또한 밤길을 그린 ‘신선(神仙)이 사는 마을’, 바람을 드로잉 한 ‘바람의 결에 바람으로 서서’는 내가 몸으로 체득한 인간의 근원적인 그리움에 대한 사유로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도 한다. 그가 이야기 하는 비 초월적 초월의 시간은 낮의 시간이 갖는 수목과의 광학 시선에서 형체를 인지하고 무상을 질료화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선택한 밤이라는 시간에서 빛을 제거하고 나만의 작은 빛의 경계를 만들었다. 최소의 빛으로 나와 사물과의 거리를 측정하여 사물의 형체에 근거한 시간 계산을 개념으로, 드로잉을 신화에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렇게 개인의 신화는 대상을 상징화 하는 곳에서 출발한 것은 회화작가로서는 최선의 방법과 방식이었고, 자신이라는 자아의 찾기 같은 것으로 이야기 하고 싶다.





2. 평면성
미학적으로 평면 회화작업은 벽면으로부터 수용을 허락 받은 장식물로서의 미술작품인 그림이다. 어쩌면 벽이 가지는 시각적 단절을 회화작업으로 해결하여 해석하고 물리적 소통의 문과 같은 의미로 보았다. 반면 조각미술은 독립적 요소가 강하여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가지며, 공간의 부유와 같아 보이는 입체 미술이다. 회화 미술이 비 조각미술의 형식이 아닌, 미술이 가지는 축도(縮圖)로 축적된 작업의 과정이 평면 미술이다. 회화작업의 평면은 의미가 넓지 못한 한계를 가진다. 존재론과 회화론에서 들뢰즈는 평면 안에서의 물질적 표현은, 존재론적으로 보아 회화의 평면성에 대하여 미의식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 그는 평면의 회화 의식을 넘어서 비교되는 존재론적으로 내재 면을 제시하였다. 의식 내용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 관계에서의 수직적, 유기적, 정적인 속성을 지닌다면 사물을 규정하는 원인이 그 사물 속에 있는 것은 수평적, 비유기적, 역동적인 속성을 지닌다. 이를 초월과 내재로 정리해 보면, 내재를 구성하는 것은 존재의 생성 원리로서의 힘이다. 감각은 내재에서 힘의 작용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존재론이고, 이 감각을 시각적으로 구현하여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회화이며 평면 예술이다.
우은정의 작업은 분명히 평면 회화 작가이다. 하지만 아방가르드적 해석으로 보았을 때 그의 전시장 전시 방식인 집적은 입체조각의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조각가가 입체를 포기하고 자신의 작업은 비 조각적 조각이라 하거나 아예 반(反) 조각이라 하며, 조각이 가지는 전유(專有)의 성격을 회화의 평면으로 양식적 변이를 시도하기도 한다. 반대로 우은정이 벽과 바닥의 의식(意識)을 의식(儀式)으로 해석하여 작업의 집적을 신화화 하였다. 평면 미술의 회화 행위는 입체적 조각에 대응하는 반회화적 물성으로의 재탄생이다. 평면미술의 조각주의나, 회화의 설치가 조각으로 전이된 회화의 확장된 개념이다. 이러한 이론은 낱장으로서 한 장 한 장의 작품성을 가진 종이가 아닌, 재료의 사물로 로잘린 크로우스가 말한 조각의 회화주의였다면,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회화의 경우처럼, 평면성의 형식적 본질을 축소한 자기비판이다. 이는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 또는 삶과의 연관을 부정하는 것이고 절대적인 자율성 속에서 안주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우은정의 자기비판은 권위적 평면을 회화의 입체주의로 변화를 주면서 자율성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전환을 했다고 평가가 된다. 다른 표현을 빌리어 말하자면 작가가 미적 규칙과 형식을 배제하면서 작가가 의도 한대로 평면 안에서의 입체조차 해체 하려는 것은 어둠의 시각에서 거리를 계산하지 않은 배치이다. 회화의 평면에 존재론적 의미가 분명히 하여야 하지만 회화가 감각을 구성하고 재생하는 과정에서, 공간적 평면성을 의도적으로 조작하여 우은정 만의 비공간적 평면공간을 만들어내는 자율성 또한 조심스럽게 보아야 한다. 평면성이 강조된 공간은 사물이 규정한 대상이 작가의 내재된 의도성에 의해, 재배치된 것으로 다분히 존재론적 성격이 강하다. 그 존재적 표현은 수평적이고 역동적인 성격과는 일부 대립한다는 지점에서 우은정 작가의 회화작업에 있어서, 그 만의 평면성은 새로운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회화 작업이다.





3. 집적
우은정의 작품전 전시장을 둘러보다보면 다수의 관객들이 그의 어마어마한 작품의 양에 대하여 진정한 화가라고 이야기를 하며 나름의 작가 평을 한다. 그렇다. 매일 그림을 그려야 하고 그리고 있어야 화가다. 라는 우은정작가의 명제는 참이다. 그렇게 미친 듯 그려온 그림들이 가끔 세상 속으로 나와 지역 미술계의 화두가 되기도 하여왔다. 결국은 그의 그림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은 창작의 산실이 나닌 전시장이다. 우리는 미술관이나 갤러리 전시장을 화이트 규브라고 한다. 전시장이 작가의 의지와 다르게 일반적 분위기로 그림을 위한 치장으로 하얀 벽을 고집하는 전통적 관례이다. 하지만 현대를 접하며 관례는 파괴되고 작가 콘셉트 우선의 전시장 만들기가 자연스런 환경이 되었다. 이번 우은정작가의 전시장 역시 현대성의 공간구성과 그가 어둔 밤은 걷고 걸으며 보아왔던 이미지를 위해서 연출된 것으로 대체로 어둡다. 적은 조명과 벽에서 오는 어둠의 무게감이 그의 그림을 누르려는 중압감에 의한 혼돈의 연출로 보인다. 사실 관람자에게는 불편한 시각으로 새벽을 기다리는 어둠의 불길한 공포도 경험한다. 하늘이 어둡고 깊은 바다가 어두워지면 우리는 이를 심연(深淵, Abyss)이라하고 미지라고 읽고는 한다. 심연은 혼돈이고 깊은 바다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혼돈은 천지 이전의 태극인 카오스의 상태로 사물을 구별하지 않는 혼란의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전시장의 분위기를 이야기하려하는 것은 다량의 드로잉 작업이 전시장에서 집적이 되어 낱장의 드로잉에서의 그림이 아닌 집적의 설치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회화는 재현이지만 재현이 아니다. 이유는 회화적 구성 요소들 간의 관계를 구성하여 내러티브를 만들거나 자신만의 행위로 귀결된다면 재현으로서 회화 요소는 감쇠된다. 회화의 평면 작업에서는 감각을 포획하는 작가 의식으로 내적 발현이 되어야 감상자와 일부 소통을 할 수 있다. 작품과 작품들 사이나 작품의 내에서 회화적 요소가 요소들 사이를 유영하여야 한다. 유영은 형체에 의한 형상들에서 질료간의 배치가 구체화 되어야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하는 형식으로 내용을 전달 할 수 있다. 회화의 질료는 감각이 되고 감각은 신체의 원초적인 특성인 생명의 역능(力能 puissance)과 관계한다. 그의 그림 안에서 자의적으로 창작된 물상의 신체는 이미 지층화되고 분화된 기관들에 의해 하나의 생명 이미지로 규정되지 않는다. 이후 절편으로 재해석하겠지만, 저작된 이미지는 심층적인 지대에서 생명을 작동하고 있는 강렬한 권력의 흐름들로 작품화 되어 감상자를 혼돈스럽게 한다. 들레즈는 이렇게 파악된 신체가 기관 없는 신체라고 했다. 회화 감각은 작가 신체의 밀도 있는 움직임 속에서 세세한 신경이 작용한다. 여러 단계로 연결된 신경의 파동은 긋기의 힘으로 외적 힘이 가해져 드로잉으로 도달한다. 우은정의 집적은 드로잉의 집적에서 감각의 집적이 되어 여러 집적 층위에서 작동하는 리듬으로 변환이 된다. 회화는 작가 감각의 리듬을 그가 본 사물의 존재를 생명케 하는 물질적 형식들 이다. 회화는 감각, 혹은 그 두 유형인 지각과 감응의 집적물로 형식과 내용이 집약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작업이 작가 우은정의 작업이다.





4. 절편
앞에서 논한 집적은 현대미술의 사조로 신사실주의 기법상 평면상에 누적된 쌓는다는 행위로 작가가 의도적으로 미적 효과를 꾀한 것이다. 앗상블라주의 우연성보다는 작가의 작위 된 의식을 반영한 형태로 보는 것이 우은정 전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같은 사물을 반복하는 것이 그 예인데, 우은정은 드로잉의 개별화의 작업을 누적하여 입체적 이미지 연출로 집적을 절편화 하였다. 우은정 작가는 드로잉의 선은 점의 연결에서 나타나는 행위라고 했다. 아마도 생성들은 소수적이고 소수자가 된다는 의미로 본다. 점은 언제나 최초이거나 기원적이다. 하지만 점으로 생성된 선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출발점도 도착점도 없고 기원도 목적지도 없다. 단지 누적된 반복이 존재 할 뿐이다. 분절과 절편성은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다. 우은정의 작업 하나하나는 분절이고 이를 집적한 것은 절편이다. 점의 연결이 파편이고 파편은 여럿이 하나하나 마디를 가지고 성장한 분절의 절편으로 보고 싶다. 전시장에서의 드로잉 입체는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함과 견고함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의 예술에 마디들을 만들어 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은 시대적으로 보아 가변적 욕망의 권력으로 이는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고 분류하고 파악하는 일반적인 요소 이기도하다.
우은정 작가는 그의 드로잉과 이번 전시의 방식론을 데리다의 차연에 두었다고 했다. 차연은 차이와 지연이다. 그의 작업에서 평면의 드로잉은 대상과의 관계성이고, 전시장의 입체적 설정은 드로잉작업의 누적으로 지연이라 할 수 있다. 차이와 지연의 대립은 이항적 절편이다. 평면에서 입체로의 변형은 원형을 절편하였고, 선 중심의 드로잉의 선형은 변형을 잠재한 절편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결국 견고함과 유연함의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의 드로잉에 다른 드로잉을 적용하고 이동시켜 다항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본다. 우은정 작가가 차연을 수용하기 위해 결국 데리다의 리좀에서 수목적 관계를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견고한 절편성은 나무이고, 나무가 가지는 나무성질의 성장과 유전을 위한 전송의 통로로서의 이분법적 원리로 보았다. 시립미술관 1층 전시장의 주 벽면을 채우고 있는 나무드로잉 집합체는 좌우와 바닥을 견인하는 수목의 관계성이다. 어쩌면 이야기의 네트워크로 나무화된 절편성과 비 수목적관계로 작용을 대립화하는 이항적 절편이외 해석 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집합시킨 나무는 나무화로 변태를 하게 되었다. 이는 나무적 절편성과 리좀적인 절편화 작용을 동시화 하면서 대립 작용을 극대화 한 것으로 해석한다. 다분히 동일한 드로잉으로서 벽과 바닥의 의미론, 두 과정의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수직적 위계인 수목구조로서의 절편을 부정화 하는 단계로 보인다. 그것은 드로잉과 작품의 배열 구조에서 비위계적 질서를 선택하였고 결국 서로 다른 정형의 과정을 끌어내기 위한 방법적 해석이기도 하다.
그가 설명하는 드로잉의 본질은 원시기초 선에서 코드로 본질의 영토 안에서 해결하려는 의도성이 강하다. 작가의 안에는 작가의 미학적 영토가 자리를 하고 있고 미술이라는 명명으로 미의 탄생은 그만의 씨족 공동체를 만들어 왔다. 결국 공동체의 부족이었고 스스로 소속해 있는 영토에서 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안주 할 수 없는 상황을 직면하였다. 이는 작가에게 숙명과 같은 수용의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 차이에서 재 코드를 하거나, 덧 코드화를 하며 재 영토화의 이항적 절편선택지에 있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 그렇다고 유연한 원시적 상황의 절편성과 현대적 견고성의 대립은 아니다. 동일한 시대, 동일한 공간에서의 선택은 구분될 수는 있지만 분리하여 설명 할 수 있는 미학의 체계가 아니다. 예술은 사회성과의 관계에서 성장한다. 지독히 개인적이거나 독자적 사고와 인지로의 예술창생은 아방가르드적이거나 사멸이다. 유연함은 사회현상이다. 유연함이 결여된 절편은 집적으로 성립이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있다. 미술문화 내에서의 사회성은 일반적 사회성의 행동 원칙과 차이가 있다. 미술가는 두 가지 사회성에서 혼돈을 가져 오기도 한다. 이를 사회적 절편으로 보면 두 사회에서 연속적 활동가로 돌출되는 경향과 이로 인해 스스로의 격리가 따른다. 이후 재결합에 의해 미적 작동하게 되지만 그만의 영토는 파악되지 않는다. 우은정의 작업일지가 그렇다. 작가가 어디에 있는지는 스스로만 알 뿐이다. 집단은 작가 자신을 지속시키는 절편들 위에서 작동할 뿐 아니라, 조직 안에서 절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강요한다. 우은정의 절편은 그래서 불편하다. 그만의 조직이외 관계성으로서의 지배되는 연결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을 노드하는 집합체로서의 예술가 개인과 미적 환경 안에서의 정치체계를 원하고 따르는 것이 그이다.



5. 우은정
수식어가 많이 붙는 지역 회화 작가 중에서 우은정은 1번이다. 화가, 문학 작가, 만화가, 철학자, 수행하는 화가 등등 이보다 더 많은 그 만의 삶이 있다. 오래 전 우은정 작가는 전시장에서 필자와의 대담에서 이런 말들을 했다. “텅 빈 마을, 홀로 달빛을 받으며 걸어가는 느낌은 그림 속으로 산책이다. 이 시간 나는 저절로 달빛처럼 흘러든다. 요요한 달빛과 바람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 가기에 나는 틈나는 대로 밤의 산길을 걷는다. 멀고 험한 길이지만, 나는 걷고 또 걷는다. 매일 밤마다 백리이상의 긴 거리를 긴 시간과 함께 어둠의 공포와도 싸워야 한다. 달빛과 바람이 좋을 땐 속리산 문장대를 중심으로 반경 백리를 둥글게 그려 상주와 보은 주변을 밤새워 걷는다. 나는 어려서부터 바람의 결에 바람으로 서 있길 좋아했고 일찍이 우리나라 여러 곳을 걸어 다녔다. 청년이 되고부터는 바람 밤길 걷기는 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에 바람을 드로잉 함으로서 생의 방편으로 삼아 회화 작업을 하게 됐다.” 필자는 그의 걸음을 긴 호흡으로 상상을 해보았다. 낮 시간이 아닌 밤 시간을 홀로 걷는 다는 것을 몇 명이나 이해하는지 묻고 싶었다.
자유는 인간의 존재를 특정 짓는다. 이 말은 자유의 의미는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자각하고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에리히 프롬의 주장이다. 우은정 작가는 예술은 자유다라면서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저항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저항은 내적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기에 저항하지 않으면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특정된 존재인 예술가가 필요로 하는 자유는 저항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우은정 작가는 ‘돈은 자유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지금과 같은 단순한 삶은 돈으로부터 자유롭다. 아주 단순하게 사니, 생활비도 적게 든다. 그래서 그 자유로움 안에서 내 식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밤길을 혼자 걷다보면 뜻밖의 마을을 만나게 된다. 휘영청 달빛 속에 빛나는 마을의 모습이 신선이 사는 마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재적 삶에 자아의 진정성을 찾기 위한 여행 같기도 하고 속박된 자아를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화가의 열망으로도 느껴진다. 그는 단순하게 사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단순하다는 의미를 쉽게 풀어 위대한 예술적 성과나 과학적 진보를 이룬 사람들의 삶을 들었다. 그들은 연구실과 집, 집과 작업실밖에 몰랐다고 하며 단순함이 결과적으로 인류에 공헌한 셈이라는 것이 우은정 그의 해석이다. 그는 독하게 심심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 심심함과 싸워 이겨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 그는 심심하다보면 무언가에 몰두하게 되고 그것이 내게는 그림이다라고 했다. 돈은 편안함을 주지만 돈은 단순한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며 나의 삶은 그림 그릴 물감과 붓 그리고 최소한의 양식만 있다면 된다고 한다. 이는 마치 자유로 부터의 도피 같은 예술가의 이상의 환경을 만든다는 내면의 유토피아 아닌가 한다.
우은정이 그의 삶에서 그림이 차지하는 부분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예술가로 사회적 환경에서의 자아정체성과 다중자아의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는가의 이해 필요이기도 하다. 그는 “나는 화가이기 때문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것은 싫어도 그려야 한다. 왜냐하면 유희가 아닌, 유일한 직업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사회적 동물의 근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말이다. 철학자를 호출하지 않아도 인간의 본성에서 그가 포함된 사회는 예술가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예술은 예술가에 의해 일정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사회가 예술에 관용적일 때 사회활동가의 한 부분으로서 예술가는 사회와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는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예술가는 자아정체성을 위한 행위로 예술창작을 하게 되고 그 안에서 다중 자아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다. 다중에서 선택된 예술가는 대중속의 혼재된 문화를 생산하게 되고 문화대중을 이끌어 가는 기능자이기도 하다. 자아정체성의 협의의 의미로 예술을 한다면 사회가 필요치 않을 수 있다. 예술은 대중과 호흡할 때 생명을 얻는다. 우은정 작가가 작품이 팔렸을 때 기분이 좋다고 하는 것은 다중사회 안에서 예술가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예술가가 속해 있는 사회 내에서, 예술적 관심의 대상이 되기 위한 창작은 작가의 개인적 삶의 이유와 관계 속에서 만들어 진다. 창작의 예술품은 상품이 되기도 하고 감상자인 대중들의 사회적 반향을 선도하기도 한다. 이를 예술과 사회화의 기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우은정의 작품이나 여타 화가들의 작품을 대하고 있는 일반 대중에게서 자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행위가 그림은 아닐 것이다. 그리는 행위 그 순간들이 선이라 앞서 이야기 하였다. 나로부터 출발을 한 것이지만 분명 그림의 기능적 측면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이는 예술은 예술가 개인의 사상과 의식을 창작한 작업을 사회상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표출해내는 것이라 하였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기 어려운 사물에 대한 예술가적 시각과 일상의 재해석 다시 해석하는 것 또한 중요한 관람자적 행위이다라고도 했다. 이성만으로 살 수 없는 세상의 환경에서 다소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순간순간의 행복으로 재포장 할 수 있는 것도 예술의 힘이라 한다. 이러한 것을 일상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라면, 인간이 주체가 예술에 의해 삶의 배경이 되고, 예술이 그들의 마음을 이끄는 주체가 된다면, 예술의 행위는 그 역할과 지위를 다한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 그 삶을 지배하는 신의 명령을 부정한다면 예술의 힘으로 자신을 해방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방은 우리는 세포로, 인간 이전 단계의 무의식적 원소 존재에서 벗어나 단위를 갖춘 인간의 수준으로 성장 하는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권위의 지시에 예술가적 자기주장으로 거역하는 것조차 위대한 행위일 수 있다. 우은정이 선택한 자유와 자신의 해방 구도는 여러 사회결속 내에서 자유행동이었고, 인간적인 행동이자 내안의 이성의 과정으로 연결된다. 그의 신화는 자유행동으로 스스로에게는 고통이지만, 의도되지 않는 돌출에 의한 부끄러움 또한 아니다. 부드러움은 우은정 작가에게 있어, 작업은 자유가 아닌 속박이 되기에 달콤한 것 같은 자유는 오히려 죄악시 하였다. 밤의 유혹을 그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의 진화를 신화로 포장을 한 듯 보이지만 그의 이성은 결코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림으로 풍요를 원하지 않았다고 빈곤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우은정은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듯하다. 창작의 고통을 고독으로 전환하는 뛰어난 기술이 있다고 의심한다. 자신이 아닌 의심으로 인해 스스로의 진화 과정에 조화로움은 피해가고 있고 내안의 끝없는 투쟁은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이다. 그러면서 그는 늘 변태와 변태를 거듭하며 새로운 종으로 재창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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