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립미술관의 첫인상은 묘하다. 비단 미술계에 종사하는 전문인들의 눈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시장을 종종 찾는 일반 관객의 눈에도 청주시립미술관의 외관 및 내부 전모는 어딘지 눈에 설다. 전형적인 화이트큐브의 모던 미술관으로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포스트모던한 감성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청주시립미술관은 미술관의 용도로 설계된 건물이 아니고 한창 산업화가 진행되던 1970년대 후반에 지어진 방송국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기 때문이다.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일반적인 전시실처럼 보이는 공간은 두 개 뿐이고 나머지 공간들은 모두 지나치기 쉬운 복도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나마 두 개의 전시실 중 하나는 천정고가 10미터에 육박하여 어떤 형식의 작품을 가져다 놓아도 공간이 작품을 압도한다. 반면 복도형 전시실들은 일반 가정집이나 사무실 정도의 낮은 천정고를 가지고 있어서 전시작품 유형에 한계가 노정된다. 이 장소에서 전시를 기획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모든 특성들이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림 없는 미술관>전은 이러한 고민 속에서 기획된 전시이다. 청주시립미술관의 전시장들과 구석구석의 공간들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을 작가들에게 던진 것이다.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은 실제 공간을 작품의 요소로 수용하는 장소특정성(site-specificity)에 관심을 두어 온 이들로, 예민한 작가들의 눈으로 공간의 쓸모를 다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시장의 높이와 넓이에 대한 새로운 측정, 유입되는 빛의 양에 대한 예민한 고려, 계단이나 유리창, 엘리베이터 등 외부적 공간의 가능성에 대한 실험 등 공간비평적 작품들이 미술관을 가득 채우게 된다.
모든 미술관에는 당연히 그림(‘그림’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의미의 미술작품)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번 청주시립미술관의 전시에 그림은 단 한 점도 없다. 관객들은 영구히 보존될 것으로 믿어지는 그림 대신에 전시 기간 동안 잠깐 존재하는, 존재했다가 사라질 운명의 작품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일시적이고 반복불가능하며 장소특정적인 이 작품들을 감상하는 일은, 동시에 이 작품들이 미술관의 특정 공간들을 어떻게 해석해냈는가를 보는 일이다. 작가들의 눈에 의해 미술관은 새로운 조건을 맞게 되고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김형관
김형관의 '첩첩산중'은 청주시립미술관 건물의 표면을 변화시킨 작품이다. 언덕에 위치한 미술관의 진입로를 걸어 현관에 이르기까지의 동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건물의 표면, 그 중 일층의 유리면에 주목한 것이다.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색채로 구현된 형상의 패턴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고 친근하다. 이 패턴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택의 발코니 문양으로 조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은 다른 예술에 비해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고, 여전히 미술관의 문턱은 높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형관은 미술이라는 것이 마치 색색의 스티커를 붙이는 것처럼 놀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 알록달록한 작품을 따라 현환으로 진입하면 더 재미있는 무엇인가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 즉 '일상과 미술이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술관의 유리면에 붙인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승운
일층에 위치한 미술관에서 가장 크고 높은 전시실에는 정승운의 작품이 있다. 정승운의 '작품이 있다'라고 했지만, 실상 전시실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공제선_붉은섬'은 텅 비어있는 공간자체가 작품인 것이다. 입구의 암막커튼을 걷고 들어서면 어둠만이 관객을 맞이한다. '공제선_붉은섬'의 공간 안쪽 어두운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조금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데, 착시에 의해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불안한 기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어둠에 눈이 차차 익숙해지면서 걸어 들어가면, 솟아오른 듯한 바닥의 수평면과 공간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붉은 빛으로 인해 전혀 다른 시공간 속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 느낌은 거대하고 통제할 수 없는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과 그럼에도 나는 안전하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이른바 숭고(sublime)의 감정이다.
이중근
이중근은 동일한 이미지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반복되는 패턴을 적극 활용하는 작가이다. '추억을 접은 공간'이라 명명된 계단 설치 작품은, 지난 시대의 추억을 담은 옛 사진들에서 이미지를 떼어내 그것을 재조합한 후 반복해 보여주는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멀리서 보면 색바랜 사진 이미지들, 누군가의 결혼식, 가족 나들이 장면, 흰 카라 교복에 단발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여학생들의 이미지가 보이고, 이 이미지들을 감싸고 있는 하트모양 부채춤의 대열이 발견될 것이다. 관객은 이곳을 밟고 지나가거나 잠시 앉아 쉬면서 여러 사진이미지들 가운데 하나를 우연히 발견하고 숨은 그림찾기를 하듯이 다음 이미지들을 찾아보게 될 것이며, 작가가 반복 편집해놓은 이미지들 속에서 자신의 과거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서은애
'내 성품 졸렬하고 어리석어 / 먼지 같은 생각의 굴레 아직 벗어나지 못하였네 / 묻노라, 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홀로 걷는 밤의 숲 적막하기만 한데 / 누가 불쌍히 여겨주리, 한 조각 흐린 그림자' 라는 한시 형식의 긴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오브제와 그림자, 그리고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서은애는,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하고 옛 그림을 차용하면서도, 전통과 현대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들어 왔다. 전통적인 산수화를 배경으로 그 안에 (조금은 희화화된) 자화상을 삽입하여, 옛사람들의 유토피아 속에서 자신이 노니는 서은애의 초기작들은 동양화단의 해묵은 논쟁들을 유쾌하게 일소하였다.그러나 서은애의 의도는 오히려 과거 사람들이 그림으로부터 얻고자 했던 본래의 목적으로 깊이 들어가고자 하는 것으로, 이 지점이 그의 작품에 탄탄한 내용과 풍요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부여했다.
'내 품성이 졸렬하고 어리석어..'라는 긴 한시 형식의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작가가 작업실 인근에서 채취한 마른 갈댓잎들을 엮어 만든 형상 한가운데 길을 걷는 인물이 위치해 있다. 벽면에 비추어진 그림자는 마른 갈댓잎이 이루어내는 풍경을 더욱 스산하게 보이게 하고, 이곳을 지나는 나그네의 모습은 쉴 곳 없이 고단해 보인다.
이선희
이선희의 작품은 개인적인 상징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추상적 사유의 결과로 만들어진 상징성이 아니라, 대단히 구체적이고 개인사적인 일화들과 관계된 것이다. 이 작품에는 젊은 여성 작가로서 결혼을 계기로 삶이 재편(再編)되는 상황을 겪으며,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여기 저기 발견된다.
작품 속 한 평의 공간으로 구획되어 있는 꽃밭을 이루고 있는 재료는 작가 자신의 (발송 후 남은) 청첩장과 과거 레지던시에서 사용했던 명함들을 재료로 하여 인생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며, 집안과 밖이 서로 반투명하게 투과되어 보이는 트레이싱페이퍼 벽돌은 가정과 일이 서로 무리 없이 넘나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르 표현하고 있고, 가장 안쪽의 직조틀에 걸려 있는 작품은 작가의 과거 기억과 관계된 것이다. 자시의 과거에 대한 성찰과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기대나 우려와 같은 마음은, 어찌 보면 지나치게 소소하고 개인적이어서 작품의 테마가 외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이선희의 작품들은 그 솔직담백한 방식으로 인해 수월하게 공감의 지점을 잡아내고 있다.
김지혜
김지혜의 작품 제목 '콩가'는 '콩고'의 오타가 아니다. 이는 작가가 상상속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지명으로, 일반적으로 소통될 수 없기에 아직은 언어라고 보기 어려운 그 어떤 것이다. 마치 '다다(Dada)'라는 말이 무의미함과 우연성을 지향해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말인 것처럼, '콩가'는 작가의 일상 속에서 수시로 떠오르는, 여기가 아닌 어디, 지금이 아닌 언제인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은 그 어떤 장소인 것이다. 때문에 구체적인 묘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김지혜의 '콩가'는 기호적인 형태로 구현되었다. 실제 존재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UFO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하고, 알 수 없는 기호적 대형으로 설치된 '콩가' 앞에서, 관객은ㅇ 오래 잊고 있었던 나만의 '콩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복기형
복기형은 흔하디흔한 사물들을 바라본다. 그의 눈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사물을 바라보고, 자신이 그렇게 바라보았던 잠시의 시간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수많은 경험 속에서 이미 익숙하여 더 바라볼 필요가 없는 사물들을, 관객은 복기형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의 '흙만찬' 도 역시 그가 이전에 사용하던 흔한 사물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종류의 작업이다. 흙과 각종 기물들을 조합하여 차려진 그의 잔치상 앞에 서면, 지금끼지 살면서 경험한 여러 장면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흙'의 상징성으로 인해 최근 흔히 '흙수저'라 칭하는 가난의 대물림을 연상하게 되고, 흙을 만지며 놀았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떠올리게 되기도 하며, 흙이 삶의 터전인 이들의 고단함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김남훈
창이 많은 전시 공간에 위치한 김남훈의 '모스_별'은 20여 개의 전등으로 이루어진 설치 작품이다. 천장에 걸쳐진 이 전등들은 한꺼번에 일정한 규칙으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는데, 그 주기가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 제목에서도 명시되어 있는 바, 이는 1800년대에 발명된 통신 기술인 모스(morse) 신호를 전등으로 구현한 것이다. 모스 부호로 변환된 텍스트는 소설이자 영화인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한 대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 속 죽음을 앞둔 십 대의 말기 암 환자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나이답게 생생하고 유머와 재치가 넘치지만, 동시에 삶과 죽음과 사랑에 대한 철학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로 나아간다. 두 사람의 대화를 전달하는 전구들은 엇비슷하게 생긴 백열전구들이지만 와트 수가 제각각이어서 발산하는 빛의 밝기도 다르며, 심지어 수명을 다해 꺼진 것들도 섞여 있다. 깜빡이는 전구들은 살아가고 대화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생명의 유비(類比)이다.
전윤정
얇고 긴 테이프를 벽에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되는 전윤정의 월드로잉 작품들은 2003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전윤정은 늘 낯선 전시장 공간에 그 어느 작가보다 긴 시간 동안 머무르며 테이프를 겹치고 쌓아 검은 형상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때로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드러내기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유기체적인 모습을 띠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전윤정은 탑에 갇혀 시간을 보냈던 동화 속 주인공 라푼젤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듯이 테이프 자락을 늘어뜨렸다 매듭짓고 묶고 푸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한 시간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흔적이 결과로 보여지는 작품이다.
최제헌
최제헌의 작업은 공간에 그리는 그림이다. 그가 선택하는 일사용품들은 공간을 캔버스 삼아 형상을 구성하고 채색하는 안료들이다. 화가들의 작품에 자신만의 색채와 형상의 언어들이 존재하듯이, 최제헌이 선택하는 바구니, 로프 등의 사물은 놀랍게도 그만의 특별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혹시 이 재료들이 일상적인 기물이 아니라 특수 제작한 것인가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색채와 형태 모두 최제헌 스타일이다. 물론 이 사물들은 모두 기성품이며 일상 공간 속에서는 주목성이 없는 것들이지만, 최제헌의 선택과 배치는 이들에 알 수 없는 완결성을 부여한다.
이자연
'사물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는 오브제들은 모두 작가의 작업실 어느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것들이다. 작가가 아닌 다른 이의 눈으로 보면 이 사물들은 단번에 휴지통으로 던져질 것들이다. 그러나 쓸모가 없거나 너저분하거나 기괴한 이 사물들은 모두, 이자연 작가 자신의 시공간에 대한 감각의 원천이 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을 둘러싼 사물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가 가진 사물의 성격이 사람을 그대로 말해준다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미술관 좌대와 선반 위에 놓여진 이 사물들은 일상 공간에서 보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준다.